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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 디지털혁명과 신계급사회 ②] ‘과거의 성공’에 중독된 한국 사회와 한국 기업 - 반전과 역전의 시대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수저론, 헬조선, 사라진 개천 용 등 지금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키워드들은 신계급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은 심화될 뿐 아니라 고착화된다. 이제 초입에 들어선 디지털혁명은 이 불평등을 ‘1대 99’의 사회로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기에 따라서는 근원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규명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도전 중 하나다. 이 도전이 갖는 의미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
<게재순서>
1)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의미
2) 디지털 혁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 사회의 전망
3) 현 시점에서 취해야 할 대안 제시의 순서
필자 김은환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KAIST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가 경영전략실장과 산업전략실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기업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기업은 경쟁의 주체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주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17년 이런 생각을 담아 ‘기업 진화의 비밀’을 출간했고 ‘산업혁명의 주역들’ 출간을 앞두고 있다. |
지난 번 글에서 공정함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이 미래 변화에 대한 둔감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미래의 변화란 어떤 것일까.
많은 것을 이뤘다는 것은 잃을 것도 많다는 뜻
현 시기를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그와 관련하여 플랫폼 자본주의, 공유경제, 인공지능, 블록체인 등 다양한 키워드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미래의 이미지를 단편적으로 전해주지만, 과연 우리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적절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IT강국이라고 부른다. 여행으로 방문한 선진국의 느린 와이파이 속도에서 다시 한 번 국가적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다. 우리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강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만큼 미래 디지털 사회에도 한 발 앞서 가고 있는 것일까?
산업혁명이란 게임의 규칙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스포츠의 예를 들면 농구의 3점 슛이나 축구의 골든골 처럼 경기 운영 규칙을 일부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경기 종목들이 출현하는 정도의 변화라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산업과 기술의 지각변동이다. 산업의 지형이 상전벽해하는 가운데 경제주체들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좋은 전략과 나쁜 전략이 뒤바뀐다. 반전과 역전의 시대다. 성장의 아이콘이자 우등생인 한국은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우리가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그만큼 잃을 것도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산업과 경제의 변화상을 표현하는 가장 주목할 만한 키워드는 플랫폼이다. 현재 플랫폼 기업은 전세계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다우지수 원년 멤버인 GE가 지수에서 제외되는 가운데 세계 시가총액 10대 기업의 자리를 플랫폼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GAFA라고 칭해지는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뿐만 아니라 유니콘, 데카콘이라 불리우는 우버, 에어비엔비 등의 공룡 스타트업이 무서운 기세로 약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앞서 있는 곳은 미국이다. 유럽도 독일을 중심으로 인더스트리4.0이라는 슬로건 하에 제조업의 파격적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가까운 중국은 미국의 GAFA에 뒤지지 않는 BATX(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라는 신흥 플랫폼 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뒤를 이으려는 스타트업 대군이 구름처럼 일어난다. 노쇠한 대국 일본조차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스타트업 혁신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다.
이런 모든 움직임에 비해 한국의 산업과 기업은 어쩐지 조용한 느낌이다. 정중동, 암중모색이라고 생각하면서 짐짓 안도하고 싶지만, 변화의 속도가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다.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기존의 제조-서비스 대기업이 플랫폼 기업으로 매끄럽게 변신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늘 혁신과 성장의 ‘작지만 매운 고추’였던 한국으로서는 불안한 상황이다. 혹 기존의 강점이 약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플랫폼 기업의 이익 독점이 오히려 공공에 이익이 되는 딜레마
새롭게 형성되는 경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게임이다. 재화의 성격부터 변한다. 플랫폼 비즈니스는 사유재와 공공재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고 있다. 공공재란 배제성과 경합성이 없는, 이를테면 등대나 국방과 같은 것이다. 플랫폼은 사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엄연한 민간 부문이지만 창출하는 재화는 공적 성격을 지닌다. 기존의 배제성과 경합성으로 분류할 경우 수도, 전기, 도로와 같은 요금재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보다 적극적인 해석으로 ‘협력재’라는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 협력재는 소비와 생산에서의 협력과 교류가 훨씬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공재를 뛰어넘어선다. 배제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포용성을 띠며, 경합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반경합성을 띤다는 점에서 이는 요금재도 공공재도 아닌 협력재로 불리운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자연독점의 성격으로만 본다면, 플랫폼 재화는 정부가 맡아 최소 가격으로 공급하는 것이 소비자 이익에는 가장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플랫폼 비즈니스란 인프라와 같이 안정적인 서비스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시도하는 기업가 정신을 요구한다. 정부가 맡을 경우 경직성과 비효율성의 ‘정부 실패’가 우려되고, 현재와 같이 민간이 주도할 경우 과도한 이윤 추구와 독점화에 따른 ‘시장 실패’ 역시 우려되는 딜레마 상황이다.
다양한 플레이어들을 참여시켜 시너지를 창출하고, 규모의 경제 때문에 무시되던 롱테일 말단, 마이너리티의 니즈까지 충족시키는 등 플랫폼의 미덕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안정적 고용 기반의 붕괴, 기존 사업체들의 몰락, 그에 따른 플랫폼의 거대화, 독점화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깊어진다.
어떠한 혁신도 절대선인 적은 없었다. 새롭게 형성된 게임은 그에 적합한 규칙을 요구한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존의 반독점 시비다. 아마존은 낮은 가격으로 기존 업체들을 무너뜨리거나 인수했는데 이것은 과거의 기준으로는 약탈적 가격에 의한 독점 행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란이 적어도 최근까지는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가격이다. 아마존은 경쟁자를 무너뜨린 뒤에도 가격을 인상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비자 후생에 이로운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독점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독점의 결과가 더 낮은 가격이라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마존의 독점은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니다. 최근 미국 공정거래위원회는 아마존에 대한 반독점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것과 무관하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규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스탠다드오일을 규율하기 위해 만든 규제가 아마존을 규제하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룰을 요구한다.
일하는 방식과 필요 역량도 바뀌어 간다. 규모의 경제가 약화되면서, 대규모의 설비나 조직이 위축되고 그에 따른 획일적, 위계적 문화도 힘을 잃는다.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 간의 아이디어 교류와 집단 지성이 경쟁 원천이 된다. 표준화된 능력 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과 발상을 지닌 인재, 또한 고립된 우등생 보다는 타인과 교감하고 창의적인 협력을 기획할 수 있는 인재가 환영받는다. 동일한 결승점을 향해 0.1초를 다투는 오늘날의 교육과 조직 문화와는 결이 다르다.
정보화혁명 때 왜 한국은 도약하고 일본은 추락했는가
1편에서도 설명했지만 신계급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래에 대한 둔감화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의 균열, 그에 따른 각자도생 마인드가 사람들을 현재의 게임에 매달리게 한다. 그 결과 미래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이것 말고도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바로 한국이 바로 전 단계의 변혁, 즉 3차 산업혁명에서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대응해왔다는 점이다.
퍼스널 컴퓨터 보급 및 산업의 전산화로 촉발된 3차 산업혁명은 토플러가 <제 3의 물결>을 쓴 1980년 즈음 가시화되었다. 1990년 등장한 인터넷까지 가세하여 디지털 혁신이 본격화되면서 세계 경제는 큰 변화를 겪는다. 헤게모니를 잃어가던 미국이 IT산업을 주축으로 혁신의 주도권을 회복하는가 하면, 미국을 위협하던 일본, 프랑스 등 기존 강국들이 정상에서 추락했다. 이 시기 욱일승천하던 일본의 몰락은 경제전쟁의 치열함을 잘 보여준다. 전통 제조업에서 일본식 경영으로 미국을 따돌렸던 일본은 3차 산업혁명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잃어버린 20년”으로 무너지고 만다.
일본의 추락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은 이 시기 놀라운 기사회생의 능력을 보여준다. 90년대 초 한국 경제 역시 비용상승과 선진국의 견제로 샌드위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때마침 폴 크루그먼이 아시아 경제 한계론을 제기했으며(1994) 마치 예언이 맞아들어가듯 외환위기가 닥쳤다(1997). 일본을 따라 추락하는 듯하던 한국은 신기술 및 서구식 경영의 과감한 도입과 더욱 공격적인 글로벌 경영으로 악바리같이 대들었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성과주의의 도입, 적극적인 현지화, 첨단 기술에 대한 공격적 경영은 일본 조차도 흉내내기 힘든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은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을 오히려 기회로 반등시키며 휘청거리는 선진국 경제를 추월했다.
대기업 체제는 여전히 강고
새로운 대안적 리더십 떠오르지 않고
대기업 수준 오른 플랫폼 기업은 너무 일찍 성장의 한계에
새로운 스타트업들은 아직 존재감이 미미
그러나 이 시기의 성공은 축복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치열한 노력이 성공하게 된 데에는 행운이라고 해야 할 하나의 우호적 조건이 있었다. 3차 산업혁명(IT)은 기존의 아날로그적 제조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게임의 장이었지만, 한국은 그 충격을 비교적 완화된 상태로 맞이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한국은 국제 분업 구조에서 산업과 기술의 변화폭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이라고 해서 전 산업이 똑같은 속도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주도하는 핵심 산업에서 격변이 일어나면 그 파장은 주변 산업으로 천천히 퍼져나간다. 이 와중에서 어떤 부위에서는 전통 산업이 더욱 강화되는 역전 현상도 일어난다. 1차 산업혁명 초기 증기기관보다 수차가 더욱 중요한 산업 동력이 되었으며, 2차 산업혁명기에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등장한 전기의 사용으로 쇠퇴하던 전통적인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다시 활성화되기도 했다.
거대한 쓰나미가 방파제를 거치면서 파도가 잦아들 듯이 정보 혁명의 파장은 한국 경제에 비교적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위력으로 찾아왔다. IT 산업의 예를 들면, 소프트웨어보다는 하드웨어 부문, 그리고 시스템 반도체 보다는 메모리 부문에 주력하면서 한국 기업은 기존의 전략과 체질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초기 성장의 성공요인이었던 리버스엔지니어링(분해 후 역조립으로 제조공법을 파악하는 방식), 일사불란한 조직력, 효율 중시 경영, 워커홀릭 문화 등이 모두 그대로 힘을 발휘했다. 그 결과 디지털 혁명의 과실을 최대한 챙기면서도 환골탈태 하지 않으면 뒤떨어질 수 밖에 없는 부담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행운’, 즉 기존의 역량으로 커다란 파고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지금에 이르러 과거에 대한 과몰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시점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한국 기업의 리더십, 조직관리, 경영시스템에서 큰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상명하복의 일사불란한 위계체제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한국의 본질적 경쟁력인 대기업 체제는 여전히 강고하며, 새로운 대안적 리더십도 대안적 전략도 떠오르지 않고 있다. 일부 대기업 수준에 오른 플랫폼 기업은 너무 일찍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상황이고 새로운 스타트업들은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다.
‘과거에 대한 중독’에서 벗어나야
지배계층의 회심이나 정치적 혁명으로 공정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은 낭만적 공상일 것이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고 그로 인해 강점과 약점이 바뀌는 산업혁명 이야말로 진정한, 그리고 건설적인 공정성 회복의 현실적인 기회다. 한국경제는 2차 산업혁명의 지각생으로서 발군의 캐치업 능력을 보여주면서 당시로서는 새로운 산업패러다임과 엘리트층을 형성했다. 그런데 3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극복하면서 기존 역량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새로운 역량을 창출하는 기회는 갖지 못했다. 2차 산업혁명의 성공 방식이 다시 한 번 재확인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90년대를 외환위기 극복의 시기, 금 모으기와 구조조정으로 기억하되 산업혁명으로서 기억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한다.
부가 양극화되고 계층이 고착화되는 신계급사회의 도래는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현재 한국사회에서 이것은 좀 더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성공의 추억으로 뿌리깊게 각인된 ‘과거로의 중독’이다. 우리는 산업혁명을 통한 반전과 역전의 기억이 취약하다. 마치 농촌에서 연장자의 지혜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듯이 기존의 승자, 기존의 강점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성스러운 과거의 역량을 자라나는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 전 사회가 자원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다는 것이다.
‘0.1초 빨리뛰기 경쟁’으론 안되는 시대
지금은 “어떻게 0.1초 더 빨리 뛸 것인가”가 아니라 현 상황을 새로운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규칙의 변화를 논의해야 할 때다. 과거 한국 경제가 갖고 있던 강인한 활력과 회복력을 다시 살리면서 동시에 양극화로 붕괴된 공정성과 사회적 통합을 복원하는 길이 어쩌면 여기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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