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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본연의 가치
제 역할 못하고 있어
지난해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에서 19개국을 대상으로 실행한 정당 간 정치적 갈등 수준 조사에서 미국과 한국이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당시 미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과 의회 난입 사건의 여파가 남아있었고, 한국 역시 대선을 지나며 시끄럽던 터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특히 한국은 정치적 갈등이 ‘매우 심각하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미국보다 높았다. 선거 승리만 바라본 양대 정당의 대립이 죽기살기식 싸움으로 확대되며 정치권의 상생이나 협치는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정당 본연의 가치는 국민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수렴하여 정책 결정과 집행에 반영하는 데에 있다. 정당은 이념이나 추구하는 정책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조직하는 단체이기에 정당의 정책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구성원들이 존재하는 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여러 정당들이 그 시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한다. 갈등 상황을 조정하고 합의점을 찾고 권력을 나누며 협치를 이뤄낼 수 있는 역량이 더욱 요구된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진영논리에 갇혀 국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정치 싸움에 매달리며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정당의 또다른 주요 역할은 미래의 정치 리더 육성이다. 이 역시 낙제점이다. 정치 이력이나 비전에 대한 다층적 평가 없이 선거 승리를 위해 명망가를 영입하거나 당의 지도부와의 친분으로 공천을 얻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책이나 미래 비전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거나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물을 훈련해 리더로 키우는 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은 지난 2021년 한국 정당의 혁신 과제를 모색하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당시 해외의 선진 사례를 조사하고 한국 정당과의 비교를 통해 ▲실질적 당내 민주주의 확대를 위한 혁신적인 노력 ▲다양한 계층의 대표성 보장 ▲청년 조직 강화와 청년을 위한 적극적인 교육 프로그램 마련 ▲실효성 있는 쌍방향 소통의 플랫폼 개발의 4가지 혁신 과제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혁신 과제들을 해결하고 건강하고 안전한 미래를 이끌 정당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디지털 기술은 미래 희망과 비전을 보여줄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만드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블록체인 기술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과 탈중앙화 자율 조직(DAO)의 대두는 수평적인 참여와 투명성, 개방성 구현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DAO를 통해 유권자들의 선호가 보다 폭넓게 반영되고, 민주적 원칙을 지키면서, 현실 제도로서 운용 가능한 새로운 정당 기반의 구축이 가능하리란 기대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래리 오브라이언(2022)은 “블록체인 기술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을까?”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우리는 분산형 블록체인 기술에 사용되는 시스템과 같이 더 나은 형태의 민주주의를 구축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 기술은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결합하고 NFT나 DAO와 같은 블록체인 도구의 보안 및 비밀성을 활용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DAO와 정치 플랫폼의
공통 요건
태재미래전략연구원은 대의제와 직접 민주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거버넌스 시스템으로서 DAO의 가능성을 실험하고자 블록체인 전문가, 정치개혁 활동가들을 초청해 토론을 진행했다. DAO를 정당 모델에 대입할 수 있는지, 블록체인 기반의 DAO로 정치 플랫폼을 운영한다면 어떤 조건과 가치를 충족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논의 끝에 DAO와 정치 플랫폼이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3대 요건으로 ▲신원(아이덴티티) ▲보상 ▲투표를 도출해냈다.
Identity: 책임있는 정치 행위자
DAO의 핵심 가치는 개성을 잃어버린 ‘대중(Mass)’을 대체하는 ‘개인’의 재발견에 있다. 정당 DAO 의 첫 요소는 바로 이러한 ‘개인’의 정체성(Identity) 정립이다.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는 투표하는 대중, 즉 보통, 평등, 비밀, 직접 선거를 보장받는 유권자가 출현했다. DAO에서의 개인은 자발적으로 책임 있는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
DAO상의 개인은 더 이상 수면 아래의 불특정 다수가 아니다. ‘이더리움’ 코인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이 내놓은 ‘SBT(Soul Bound Token)’라는 기술적 장치를 통해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활동 이력은 투명하게 공개되며 양도불가능한 속성으로 남게 된다. 즉, 개인의 익명성은 보장받으면서 정체성은 드러낼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일반 대중들에게 DAO에서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절차가 까다롭고 낯설다. 기술적인 보편성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것이 DAO의 대중화를 가로막는 현실적 진입장벽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웹2.0 기반을 혼용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다. 생성된 정체성(지갑) 관리에 필요한 암호(생성키)를 스스로 관리하게끔 하는 ‘자가 수탁(Self-Custody) 방식’이 웹3.0이 추구하는 가치를 가장 가깝게 구현한다. 그러나 기업들은 사용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비자가 수탁(Non Self-Custody) 방식 (중앙서버에서 암호를 관리하는 하이브리드 형태)’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어느 경우에도 핵심 가치인 ‘탈중앙화’의 추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상: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일에 참여
블록체인은 거래 안정성과 활성화를 위해 이용자들에게 토큰이라는 보상 시스템을 운용한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성공은 실용성과 직관적인 사용자 경험 제공에 기인했다. 마찬가지로 DAO의 개인은 보다 많은 관심사와 영역의 의사결정 절차에 손쉽게 참여하여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평판과 이력을 강화할 수 있다. 사용자 경험이 증가하며 그 효능감이 강화되면 더 많은 개인이 그 과정에 참여하는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한다.
정당 DAO의 경우 보상 시스템으로서 토큰이 반드시 경제적 보상일 필요는 없으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기여했다는 자부심과 정치적 효능감이 보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당 DAO와 같은 소셜DAO는 원대하고 아름다운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함께 한다는 자긍심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투표: 수평적 공론과 숙의를 통한 의사결정
투표는 더 이상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일상의 정치 행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블록체인의 신원 증명 및 거래 확인 기술을 활용하면 다양한 투표 행위가 일상으로 들어오기 용이하다. DAO의 운영 방향에 따라 정치 투표처럼 1인 1표제를 지향할지, 주식회사처럼 1주 1표제를 택할지, 1인 1표 기반 위임 시스템 혹은 가중치를 알고리즘으로 산정시켜주는 방식을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 요소가 대거 유입되면서 선거와 투표에 참여하는 개인의 행동 양식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공직의 기능을 쪼개어 분담하는 방식도 등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스스로 자신의 입법 과제의 제안과 그 숙의 과정을 공모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능 분담 경험이 쌓이게 되면 특정한 보상 제공이나 제도 도입을 통해 권력을 나누고 위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웹3.0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거버넌스
정치 시스템은 당대의 기술과 가치를 반영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산업 문명 시대의 기술과 가치를 반영한 제도이다. 기술의 발전에 맞춰 사회 전체의 구조 역시 재편될 것이다. 따라서 웹3.0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민주주의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제는 디지털 전환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기술적 성취를 어떻게 구성하여 현 정치 제도의 바람직한 진화를 이룰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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