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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여시재는 3년째 이어지고 있는 미-중 무역분쟁이 미칠 세계적 수준의 정치·경제적 파장을 분석하고 향후 우리에게 어떤 과제를 던질 것인지를 전망하기 위해 ‘글로벌 경제전망 연구팀’을 구성해 연구를 진행해왔습니다. 이용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주영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이현태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전병조 여시재 특별연구원(전 KB증권 사장) 등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만나게 되면서 연구 방향도 수정-보완해가면서 진행중입니다. 그 첫 결과물을 내놓습니다. 첫 번째는 이용욱 교수가 썼습니다. |
“패권은 나눌 수 없다” VS “충돌 감당할 수 없다”
중국의 부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초 이래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놓고 결국 충돌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국제정치 전문가들 뿐만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관심과 호기로운 예측을 불러일으켰다. 미 시카고 대학의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와 같은 현실주의자는 미-중 충돌이 시간의 문제일 뿐 필연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국제정치의 장에서 ‘패권은 궁극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시각에 기반한다. 이에 반해, 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은 미-중 간의 심화된 경제 상호의존이 양국 간의 충돌 가능성을 현저히 낮출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과 중국은 사실상 경제 운명공동체로서 양국 간 갈등이 협상을 통해 관리되고 봉합되어 충돌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미-중 충돌이 당사국 두 나라를 넘어 글로벌 경제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던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차 협상 타결은 停戰일뿐
기술패권 문제로 확전될 것
미-중 무역분쟁은 2018년 7월 8일 미국이 중국 상품에 대해 340억 달러 규모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하며 시작됐다. 이 분쟁은 2019년 12월 15일 스몰딜 형태로 1차 협상을 타결하고 2020년 1월 15일 협정에 정식 서명함으로서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1차 협상 타결이 ‘정전(停戰)’인 것은 앞으로 재개될 2차 협상이 보다 근본적인 쟁점인 ‘중국제도 2025’를 비롯한 기술이전 문제, 산업스파이 등 기술 패권을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차 협상이 1차 협상보다 훨씬 더 험난한 여정을 거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인 이유이다.
따라서 이번 미-중 무역분쟁이 미-중 충돌의 서막이 될지, 아니면 미-중 갈등의 관리와 봉합으로 판가름 날지는 아직 두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세계 권력지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두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美 리더십 한계도 함께 드러나
우선, 해외시장 의존도가 높은 중국 경제의 취약성 만큼이나 미국 권력과 리더십의 한계도 국제정치무대에서 노정되었다. 아래에 후술하듯이 미국은 미-중 무역분쟁 과정에서 당초 목표로 했던 결과를 얻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미국 글로벌 파워의 핵심 자산인 동맹국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또 다른 측면은 미국 내부의 이견과 갈등이다. 미-중 무역분쟁이 예상보다 길어짐에 따라 백악관, 상무부, 재무부, 국방부 등에서 대중국 압박의 수위와 방법을 놓고 정부 내 이견이 표출했고,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시장참여자들 역시 정부정책에 적지 않은 비판과 우려를 내놓았다.
두 현상 모두 미국이 처한 국내외 여건이 향후 대중국 압박을 장기간 지속하기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美, 中의 후퇴 끌어내
그러나 당초 기대에는 못미쳐
먼저, 미국 권력과 리더십의 한계를 살펴보자. 일견 미국 권력과 리더십의 한계가 미-중 무역분쟁을 통해 드러났다는 논지는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미-중 무역분쟁 자체가 미국의 공세로 시작했고 이후 1년 6개월 동안 대중국 관세 압박 수위를 높여 결국 1차 협상을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양보를 얻어내며 타결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만큼 얻었다고 보기 어렵다.
1차 협상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2019년 12월 15일 자정부터 적용하기로 했던 16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추가 관세를 유예하며, 2019년 9월 1일부터 중국 상품에 부과하고 있던 1200억 달러 규모의 관세를 15%에서 7.5%로 축소하기로 하였다. 중국은 이에 상응해 앞으로 2년간 미국산 농산물 320억달러, 미국산 제품과 서비스 수입을 2000억 달러 이상으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중국이 미국에 양보한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한 방법은 무역분쟁 직전인 2017년 중국의 대미 수입 총액인 1860 억 달러와 비교하는 것이다. 중국이 양보한 규모는 중국이 2017년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총량을 넘어서는 막대한 규모다. 중국은 이에 더해 미국 지식재산권(IP) 보호 강화, 강제 기술 이전 방지, 금융시장 개방 확대 등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하였다. 정리하면 미국은 관세의 정치를 통해 중국으로부터 ‘실질소득 이전’ 효과를 보았고, 관세는 관세대로 새로운 미국 소득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와 나바로의 예측
어떤 것도 예상대로 진행 안돼
그러나 이는 중국이 과연 합의된 내용을 실제로 이행할 것이냐는 미국 내 비판적 목소리는 차치하고서도 당초 미국이 예상한 기대치를 하회하는 것이었다. 미-중 무역분쟁 개전 당시 피터 나바로(Peter Navarro) 백악관 무역·제조 국장은 중국이 미국의 관세부과에 맞불을 놓는 대항관세를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중국 경제가 미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논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분쟁은 오래지 않아 매우 쉽게 미국의 승리로 끝날 것이며 중국 내 많은 미국 회사들이 미국으로 돌아오는 리쇼어링을 목도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미-중 무역분쟁의 가장 큰 혜택은 미국 농가에 돌아갈 것이며 결국 미국은 미-중 무역분쟁을 통해 대중국 무역적자를 대폭 줄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중 어떤 것도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중국은 미국의 4차례 관세부과 조치 모두 대항관세로 맞대응(tit-for-tat) 했다. 2018년 7월 8일 미국산 농산물, 자동차, 수산물 등 545개 품목에 340억 달러의 관세를 부과하였고, 이어 2018년 8월 23일엔 미국 에너지 부문 114개 품목에 160억 달러 규모의 관세를 적용하였다. 중국은 2018년 9월 24일 기타 미국 수입제품에 600억 달러 규모의 관세를 부과했고, 2019년 8월 6일에는 미국 농산물 구매 중단을 발표하였다.
美의 월평균 對中 무역적자
오바마 때보다 100억달러 증가
미-중 무역분쟁이 쉬운 미국의 승리로 조기 종전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미국은 중국과 2차 무역분쟁 협상을 아직 열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 투자하던 미국 기업 일부는 미국 본토에 리쇼어링 하는 대신 베트남 등 동남아로 사업을 이전하였고 미국 농가는 수혜 대신 수익 감소를 경험하였다. 농가 수익 감소는 중국이 단행한 미국산 콩 수입 규제 뿐만 아니라 미국의 관세 부과에 따른 중국산 철강 가격 상승으로 인한 농기구 구매비용 증가에 기인하였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오히려 증가하였다. 전임 오바마 대통령 재임시 400억 7000만 달러 였던 월평균 대중 무역적자가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500억 1000만 달러로 늘었다. 2018년 무역분쟁이 시작한 이후에도 중국의 대미 수입은 1200억 달러, 반면 미국의 대중 수입은 5400 억 달러로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가 개선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美의 화웨이 제재 요구에 전면 동참한 나라 한곳도 없어
세계 권력지도의 관점에서 볼 때 미국에 더 뼈아픈 현실은 핵심 동맹국 다수가 미국의 화웨이 제재 동참 요구를 거절하였거나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미국은 2019년 5월 1일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에 대한 거래제한조치를 결정하였다. 미국 상무부는 이 조치를 통해 미국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할 경우 별도로 상무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였으며 ICT와 관련된 기술 수출에 엄격한 모니터링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미국은 주요 동맹국을 포함한 총 61개국에 화웨이 제재 동참을 요청하였다.
현재까지 나타난 미국 제재 동참 요청에 대한 타 국가들의 반응은 미국으로선 실망 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다. 총 61개국 중 미국이 요청한 전면 제재를 확약한 국가는 3곳(호주, 뉴질랜드, 베트남), 부분 제재 동참 국가는 3곳(영국, 일본, 노르웨이)에 그쳤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이태리,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아세안 10개국을 비롯한 나머지 55개국은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였거나 사실상 동참을 회피하는 미온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한국 정부도 시장참여자의 결정에 따른다는 원론적 입장을 피력하여 ‘미온파’에 속한다. 전면 제재 확약 3개국의 경우에도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경우 이미 2012~2013년 경 부터 안보와 기술 예속의 문제로 화웨이의 국가사업 참여를 제한해 왔다. 베트남은 미국의 요청에 호응 하였다기 보다는 국가 산업 정책의 일환으로 5G 산업을 육성하고 있어 국내 산업 보호 차원에서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하였다는 것이 오히려 맞는 해석이다. 달리 말하면, 미국에 전면 동조한 국가는 단 한 국가도 없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화웨이에 대한 각국의 어중간한 태도는
세계권력지도 재편과 관련되기 때문
미-중을 둘러싼 세계권력지도의 양상을 관찰하는데 있어 화웨이 사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5G 네트워크 산업이 내포하는 정치, 경제, 군사안보상의 복잡하고 불확실한 기대와 우려 때문이다. 5G 공급자로서 화웨이의 최대 장점은 뚜렷한 가격 경쟁력에 있다. 화웨이는 5G 분야의 타 경쟁사보다 훨씬 저렴하게 장비와 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이러한 가격 경쟁력과 함께 첨단산업 발전을 위해 5G 인프라를 조속히 구축해야 되는 국가에게 있어서 화웨이를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많은 국가가 미국의 요청에 선뜻 동참하지 못한 이유이다. 반면, 다양한 공급자 리스크도 존재한다. 국내 통신시장과 장비 분야가 외국 단일 공급자에 종속되는 문제, 사이버 공격이 일어날 수도 있는 잠재적 진입 지점의 확대에 따른 사이버 공격 취약성 확대, 정보의 생성과 유통에 관한 다양한 보안상의 문제 등이다. 따라서 각국은 경제성과 함께 통신망의 통합성과 통신 주권, 민감한 정보의 보안과 감시, 기술 예속에 따른 정치적 종속 가능성, 미국과의 관계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화웨이 문제를 검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더해, 경로의존성과 매몰비용이 높은 네트워크 사업의 특성상 한번 정한 공급자를 임의로 변경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들이 미국의 제재 동참 요청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를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계속 수용하기로 한 결정은 세계권력지도가 중대한 지각변동의 시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방증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상무부는 對中 매파
국방부는 판단 달라
재무부도 국방부에 동조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는 미국내 이견 표출도 동반하였다. 미국 내에서 매파 역할을 자임하며 관세 압박, 화웨이 경제 제재를 공세적으로 주도한 곳은 상무부였다. 재무부도 미-중 무역 균형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미국 테크 기업들에 대한 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등 큰 틀에서 상무부와 보조를 맞추었다. 하지만 1차 협상 타결을 앞두고 중국을 환율조작국에서 전격 제외하는 등 미-중 무역분쟁의 조기 종결에 정책 무게를 실었다. 국방부는 상무부의 화웨이 제재 강화 구상에 제동을 걸었다. 상무부 제재 강화 방안의 골자는 화웨이의 우회 부품 공급망 옥죄기였다. 기존 제재 조치는 미국 기술이 25% 이상 적용된 부품의 경우 화웨이와 거래를 제한하였다. 상무부는 이를 10%로 낮추어 화웨이가 미국을 우회하여 미국 기업의 해외 시설을 이용하여 부품을 공급 받는 경로를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방부는 이 조치가 화웨이를 주 수입원으로 삼고 있는 대표적인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기업의 수익 악화를 가져오며, 수익 악화는 결국 이들 기업의 연구개발 비용 감소로 연결되어 미국이 필요한 대중국 기술 우위를 어렵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무부에 반대하였다. 재무부 역시 국방부에 동조하여 상무부의 제재 강화 방안은 최종 철회되었다. 일부 월스트리트 핵심 인사들은 미-중 무역분쟁 중에 제기된 연방준비이사회의 금리 인하 방침에 반대하였다. 금리 인하는 일반적으로 주가 상승을 일으켜 월스트리트의 환영을 받는 정책인데 이것에 반대한 이유는 금리 인하가 트럼프 정부의 대중 무역전쟁을 지속시키는 “실탄”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내 갈등은 미국이 자국 기업과 소비자, 미국 경제의 희생 없이 중국과 맞서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는 중국에도 해당한다.
안보 중심 국제정치 쇠퇴
이합집산 각자도생 발흥
미-중 무역분쟁의 전개와 결과에 대한 앞선 분석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유의미한 국제정치 흐름을 보여준다. 첫째, 미-중간 국력 측정의 가변성 확대이다. 군사력, GDP, 인구구조 등을 사용하여 개별 국가 단위로 국력을 측정하고 이를 단순 비교를 통해 미국이 중국 보다 앞서있다는 시각은 국력의 네트워크적 관계성을 간과하게 한다. 무역, 투자, 기술의존성,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 가치사슬에서의 위치, 통화와 금융, 안보관계가 국가 간에 다층적, 복합적, 상대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화웨이 사례에서 보듯 네트워크적 관계성이 미-중 사이에서 다수의 국가가 활용하는 지표이다. 둘째, 미-중을 비롯한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 이합집산의 발흥과 균형의 퇴각이다. 국제정치 3대 균형이론인 세력균형, 위협균형, 이익균형 모두 모호성의 심연에 빠졌다. 어떤 세력에 대한 균형인가? 어떤 위협에 대한 균형인가? 어떤 이익에 대한 균형인가? 앞서 논의한 네트워크적 관계성(혹은 관계 권력)은 이 모든 균형의 준거점을 허물어뜨렸다. 균형은 다시 규정되어야만 하는 대상이지 더 이상 객관적으로 주어진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이합집산과 각자도생이 빈번한 불확실한 국제정치를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국익 규정의 복합화이다. 미-중 무역분쟁 과정에서 나타난 미국내 이견과 갈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행위자가 다양한 이익을 내세우며 국익을 규정하고 관철하려고 노력한다. 화웨이 제재 문제로 미-중 사이에 끼인 국가들은 복합방정식을 풀 듯 안보논리, 경제논리, 위협인식, 자국 산업정책, 국내 정파 간의 이해득실을 연계하며 국내외 시장의 반응까지 고려하여 국가의 선택을 도출하려고 한다. 국익의 복합화이자 안보중심 국제정치의 상대적 쇠락이다.
한-중-일 3국관계가 미-중관계에 종속 되면 안돼
독자성 구축이 중요
이러한 국제정치 흐름과 맥락을 볼 때 한-중-일 관계 역시 지금도 어려운 국면이지만 가까운 미래까지 불확실성의 파고를 넘나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중-일 관계가 미-중 관계의 하위체계로 남는다면 한-중-일 관계는 미-중 관계의 부침에 따라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종속 변수가 된다. 종속 변수가 된 한-중-일 관계는 삼국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합의와 약속을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관계가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고 도태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크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경우 고래사이에 끼인 새우의 ‘어려운’ 선택도 추가로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불확실한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한-중-일은 삼국 관계 안정과 공동번영을 위한 첫 걸음을 삼국 관계의 독자성 구축에서 찾아야 한다. 삼국 관계의 독자성 구축이란 그 최소한의 목표가 미-중 관계에 예속되지 않는 한-중-일 관계를 구현하는 것이며 목표의 최대치는 미-중 관계를 견인할 정도의 견고한 삼국 관계를 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한-중-일은 ‘정경분리원칙’이라는 큰 틀을 국가정상 수준의 합의를 통해 복원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역, 투자, 금융, 에너지, 환경 등 미시적인 수준에서 분야별 다양한 협력도 한-중-일 관계 정상화에 도움이 되겠으나 이러한 협력이 부족해서 최근 한-중-일 관계가 악화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양자, 혹은 삼자 관계의 악화가 기능적으로 필요한 협력의 부재와 경제 상호 제재까지 초래하였다.
코로나 위기가
한-중-일 관계 재정립의 전기 될 수도
기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30년 넘게 급속도로 심화된 양자관계를 포함한 삼국 간 경제상호의존과 공동번영은 규범적 성격의 정경분리원칙을 토대로 구체화되었다. 한-중-일 삼국이 정경분리원칙의 복원에 나설 경우 정경분리원칙의 예외 조항까지를 협정문에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삼국 간 합의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삼국 간 공동합의가 최적이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한국은 중국 혹은 일본과 먼저 양자 정경분리원칙 합의를 추진하고 남은 파트너를 초대하는 외교 전략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현 시점에서 냉정하게 한-중-일 관계를 바라보면 이러한 협력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질 수 있다. 위기가 기회란 말이 있듯이 한-중-일 삼국은 코로나19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관계정상화의 동력을 확보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닫힌 성곽의 시대 도래”
“덜 개방되고 덜 자유로운 세상 올 것”
세계 도처에서 진행 중인 코로나19는 그 결과의 파급력에 따라 향후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다수의 전망이 나오고 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기고문에서 코로나19가 열린 자유질서의 도태와 닫힌 성곽시대의 도래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의 무작위적 파괴력이 국가자급자족의 필요성과 배타적인 인종혐오를 증폭시켜 비교우위와 비배타성에 기반한 다자주의 자유경제질서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토드 터커(Todd Tucker) 루스벨트재단 국가관리연구소장은 물자와 식량의 안보화가 대두되며 해외 생산공장의 국내 이전 등이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스테판 월트(Stephen Walt) 역시 코로나19 사태가 “덜 개방되고 덜 번영하며 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며 특히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가 이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서구의 퇴각 촉진할 것인가
세계권력지도의 지형변화 측면에서는 상이한 견해가 관찰된다. 먼저, 코로나19 사태는 미국과 유럽이 대표하는 서구의 퇴각을 촉진시킬 것이며 이는 아시아로의 점진적인 권력이동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는 관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스테판 월트와 독일 슈피겔지 등에서 제기된 서구 퇴각 견해에 따르면 코로나 19 사태는 미국과 주요 유럽 국가들이 처한 국가 리더십의 정책 판단 능력 부족, 국가 시스템의 취약성, 위기에 대처하는 사회적 역량과 국민적 공감대의 부재 등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다시 말해 코로나19가 이미 깊숙하게 진행되어 온 서구 사회의 분열과 병리를 현실로 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이고, 이는 대만, 한국, 홍콩, 싱가포르 등 코로나19에 신속하게 대처한 아시아 국가들의 역량과 대비된다는 것이다.
생산의 중국 VS 금융의 미국
반면, 코로나19 사태가 미국의 힘을 재확인시켰다는 견해의 핵심은 미국의 금융권력에 있다.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세계경제 운용에 있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위상이다. 밴 버넹키(Ben Bernanke)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2020년 4월 7일 워싱턴 DC 소재의 브루킹스 연구소가 주최한 웨비나(Webminar·web+seminar)에서 미국 Fed는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명실공히 세계의 중앙은행이 되었다고 설파하였다. 버냉키의 논리는 직설적이고 단순하다. 세계경제는 기축통화인 달러의 유동성을 기반으로 움직이고 달러의 유일한 공급원은 Fed라는 것이다. Fed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미국 금융시장 안정과 세계경제시스템에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하기 위해 한국은행을 비롯한 전세계 14개 중앙은행과 스와프협정을 맺었고 타국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미국 국채 레포(환매조건부채권) 시장도 개설하였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반 예상과 달리 달러 위상 강화로 종결되었듯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도 미국의 경제권력을 현실로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권력의 핵심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생산에서 금융으로 넘어갔듯이 세계경제질서를 운용하는 주체는 생산의 중국이 아닌 금융의 미국이라는 점이 부각된다.
‘군사력만으로 국민 지킬 수 없다’ 보여준 코로나19
정리하면, 코로나19 이후에 펼쳐질 세계질서의 향방은 안보 논리와 경제 논리 각 영역의 내부 논쟁과 두 논리 간의 상호작용으로 갈릴 전망이다. 안보 논리 내부 논쟁의 핵심은 국가안보의 중심이 전통적인 군사안보에서 인간안보로 이동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코로나19 사태는 군사력만으로는 국민을 지킬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기보다는 의료시스템, 사회안전망, 상대방 배려와 같은 사회적 가치가 사람과 국가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경제 논리 역시 신자유주의적 경제효율성과 케인지안적 경제안정성 간의 재논쟁이 예상된다. 이는 효율 중심의 탈국가적 생산, 거래, 소비, 투자가 국가와 국민이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제때에 효과적으로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을 코로나19 사태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안보 논리(군사안보 vs. 인간안보)와 경제 논리(경제효율성 vs. 경제안정성)를 교차하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질서를 네 가지 시나리오로 전망해 볼 수 있다(아래 표1).
경제효율성과 군사안보 중심의 결합은 코로나19 이전의 신자유주의 시대로 회귀를 뜻한다. 두 번째 경제안정성과 군사안보 중심의 결합은 그 역사적 예시로서 냉전 시대를 들 수 있다. 미-소의 극심한 체제 대립 속에 고용안정을 경제정책의 우선순위로 둔 안정적 경제성장을 도모한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번째 경제안정성과 인간안보의 집합은 앞서 언급한 키신저의 자급자족형 성곽 시대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효율성과 인간안보의 결합은 ‘미지의 시대’이다. 미지의 시대란 아직 역사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질서를 말한다. 인간안보가 고용, 사회안전망, 사회복지 등과 연관된다고 볼 때 수익 중심의 경제효율성과 인간안보가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적 문제와 함께 군사안보를 넘어선 인간안보의 시대는 아직 도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미지’란 창의의 공간이기도 하다. 경제효율성과 인간안보를 절묘하게 절충하는 세계질서가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세계질서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만들어져가는 현실
세계질서는 주어진 사실이 아닌 만들어져가는 현실이다. 미-중 양자 관계의 전개 양상과 한-중-일 관계 재정립의 성패에 따라 세계질서의 방향성이 가름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제기된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안보와 경제인가”라는 전지구적 문제의식은 미국과 중국, 한-중-일의 선택지인 협치와 각자도생 사이에서 구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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