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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 디지털혁명과 신계급사회 ①] 1대 99의 사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것인가 -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도전
수저론, 헬조선, 사라진 개천 용 등 지금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키워드들은 신계급사회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보인다. 부와 권력의 불평등은 심화될 뿐 아니라 고착화된다. 이제 초입에 들어선 디지털혁명은 이 불평등을 ‘1대 99’의 사회로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기에 따라서는 근원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규명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도전 중 하나다. 이 도전이 갖는 의미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게재 순서>
1)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의미
2) 디지털 혁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 사회의 전망
3) 현 시점에서 취해야 할 대안 제시의 순서로 세 차례에 나눠 싣는다.
필자 김은환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KAIST와 성균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삼성경제연구소에 들어가 경영전략실장과 산업전략실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기업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기업은 경쟁의 주체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주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17년 이런 생각을 담아 ‘기업 진화의 비밀’을 출간했고 ‘산업혁명의 주역들’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두 얼굴, ‘한강의 기적’ 대 ‘헬조선’
한국 경제의 성공은 흔히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다.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기적적 성장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지나면서도 꺼지지 않은 진행형의 사건이다. 이러한 장기간의 놀라운 성장은 우리들끼리의 자화자찬이 아니며 세계의 석학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스탠포드대 찰스 존스 교수의 성장론 교과서 <경제성장입문>의 표지는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는 한반도의 위성 사진이다. 환하게 빛나는 한반도 남단의 야경은 그 자체로 성장의 아이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진실의 이면에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헬조선의 담론이 도사리고 있다. 견실한 성장과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은 분배에도 불구하고 왜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옥의 이미지, 즉 헬조선을 거론하는 것일까? 상대적 박탈감인가? 곱게 자란 젊은 세대의 철없는 투정인가? 아니면 승자독식 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이 한계에 이른 것인가?
문제의 본질, ‘부러진 사다리’
헬조선을, 주관적 인식이나 느낌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엄중하다. 문제의 근원은 역시 분배(소득과 자산)의 양극화일 것이다. 특히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이 양극화의 부작용이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그 유력한 요인 중 하나는 경쟁의 심화이다. 경쟁이란 한국이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이래 과거 급제를 통해 신분상승의 꿈을 간직해 온 한민족에게 해방과 한국전쟁은 동일한 출발선, 즉 사상 유례없는 기회균등의 장을 제공했다. 때맞춰 고도성장기가 시작되면서 노력에 비례한 성과가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성공 확률이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학생들이 사당오락을 불사하며 학업에 열중하고 노동자는 공장에서, 화이트컬러는 사무실과 영업 현장에서 워커홀릭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이었으나 크게 봐서 반칙 없는 경쟁이었고 해볼만한 경쟁이었다. 자수성가한 대통령, 장관, CEO 등 개천에서 용들이 출몰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경제와 인구 성장세의 성장세가 동시에 늦춰지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인구가 줄면 경쟁자의 수도 주는 것이 아닐까? 꼭 그렇지 않다. 인구 증가 둔화라는 경쟁 완화 요인은 대학진학률의 증가로 상쇄되었으며 경제 발전은 사람들의 기대 수준을 높였다. 반면 성장 둔화로 인해 조직이 줄어들면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폭과 높이가 모두 줄어들었다. 기업, 공직, 전문직 모두 포스트가, 특히 중간층이 급격하게 줄었다. 우리보다 먼저 이를 겪은 미국에서는 이 현상을 ‘부러진 사다리’라고 명명했다. 압축성장을 해 온 우리에게 변화의 충격은 더욱 컸고 이것이 새로운 세대의 박탈감을 증폭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다
설상가상으로 공정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고도성장 초기에는 모두가 가난했지만 성장이 승자와 패자를 나누었다. 교육투자를 중시하는 ‘우골탑’의 전통은 더욱 강화되었다. 학력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험한 베이비부머 세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소득과 학력 간의 연결고리가 강화되면서 ‘부의 대물림’이 기정사실화 되고 금수저가 개천 용을 대체했다.
경쟁 자체가 심화된 상태에서 부모의 소득에 따른 차별마저 더해지면 하위 계층, 소위 흙수저들은 희망을 잃는다. 공정한 경쟁, 해볼만한 경쟁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의 가장자리에서 저 높은 바늘구멍을 바라만 보는 상황이 벌어진다. 해봐야 안되는 경쟁에서 금수저의 승리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불쾌한 체험에서 ‘헬조선’의 씨앗이 자라난다.
더욱이 이것은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패자는 좌절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평생 빠져나갈 수 없는 저소득, 고용불안, 열악한 근무환경의 길로 휩쓸린다. 그것은 그들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경쟁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부의 대물림, 즉 소득 차이에 의해 학력과 경력, 결국에는 인생의 기회가 차별화된 결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서서히 뒤덮어 가는 ‘신계급사회’의 실체이다.
‘의자 뺏기 게임’에 몰두하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불공정성은 진짜 문제일까.
우리는 흔히 원인을 알면 해결책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지구가 자전하는 원인이 만유인력임을 알았다고 하자. 그러면 자전을 멈출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자녀에 대한 교육 투자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제 1원리인 재산권과 직결되어 있다. 평생 노력해서 얻은 성과를 자녀에게 전달할 수 없도록 한다면, 공정성에는 도움이 될 지 모르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부의 대물림 문제는 단기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응급 질환이 아니다.
공정성에 가려져 인식되지 않고 있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불공정성에 대한 과민성과는 대조되는 미래에 대한 둔감성이다. 기회가 좁아지는 병목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기회라도 차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의자 뺏기 게임’을 벌인다. 더 높은 기회로부터 배제된 좌절감은 그나마 열려 있는 기회를 향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 싸움에서 얻은 소소한 기득권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뭔가 더 넓은 시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기는 어려워진다.
공정은 물론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공정을 경직적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변화를 구속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노력에 비례한 성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과연 그 노력이 정말 필요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라는 보다 중요한 질문이 가려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많은 청년들이 준비하고 있는 공무원 시험은 과연 미래에 의미있는 능력을 측정하고 있을까? 과도한 세부 지식을 묻는 국사 시험 문항이 얼마 전에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지식이 디지털 혁명과 그렇게 큰 관계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것을 힘들게 암기한 수험생으로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자신의 노력을 무효로 만들지 모른다는 걱정부터 들 것이다.
공정에 대한 사회적 과민은 다른 한 편, 시대의 변화에 대한 둔감성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맞지 않는 과거의 게임 규칙에 집착하면서 그 규칙 아래 누가 더 높은 점수를 획득했는가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0.1점차 승패에 모두 정신이 팔린 사이 지각은 변동하고 있다.
불공정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불공정성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득권층이 스스로 자신의 어드밴티지를 양보한 적도 없거니와, 피지배층이 혁명을 통해 공정한 출발선을 만든 사례도 못지 않게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현실성 있는 것은 기술과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 즉 게임 규칙의 재편이다. 규칙이 변하면서 기존의 지배층이 우위를 상실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읽은 신흥 계층이 부상할 기회가 열린다. 노예농장주가 농노를 거느린 봉건영주에 의해 대체되었고, 폐쇄적 길드조직이 근대 부르주아에 의해 교체되었다. 산업혁명은 다수의 기계공을 앙트러프러너로 변신시켰으며, 20세기 대량생산기술은, 성직자나 교수 외에 별 다른 진로가 없던 대학생들을 대기업의 경영관리자로 변신시켰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강자-약자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이다.
시대가 변화하는 와중에 자신이 가진 소소한 기득권에 집착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탐대실이다. 게임의 규칙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트렌드를 읽고 선제적으로 대응한 이들은 개천의 용이 될 기회를 얻는다. 뻔하고 예상 가능하던 세상이 변화와 역동성으로 충만하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모험과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일들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를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4차 산업혁명, 게임의 규칙이 바뀐다
한국은 고도성장의 아이콘으로서 2, 3차 산업혁명을 압축적으로 겪으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가히 세계 경제성장의 우등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성공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 동안의 성공 규칙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역동적이었던 사회가 경직되면서 옛날 규칙에 대한 집착이 더욱 심하다.
4차 산업혁명은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이 변화는 곧 경쟁 규칙의 변경을 뜻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변화 요구에 대해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한바탕 홍역을 앓고 있다. 민주주의는 물론 주주 중시 경영 체제 역시 이러한 룰 체인징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데 한계가 있다. 과연 한국은 4차 산업혁명에서도 다시 한 단계 도약하는 열린 마음과 변신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과거 경쟁 룰에 집착하여 모든 변화를 거부하고 문자 그대로 헬조선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지금 이 시점은 바로 그 과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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