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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재 북리뷰] 『관자』 CEO형 시장주의자이자 균부를 중시한 계획경제가, 관중에게 길을 묻다 - 『관자』 김필수∙고대혁 외 옮김, 소나무출판사, 2015

이광재 (여시재 원장)

2019.05.03

‘관중’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관중과 포숙아는 참된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임과 동시에 지금의 산둥반도에 위치한 소국이었던 제나라를 춘추시대 최고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뛰어난 정치가들이었다. 특히 관중(기원 전 약 725~645년, 이름 이오)은 포숙아의 추천으로 제 환공의 재상 자리에 올라 40여 년 동안 제나라를 이끌었던 최고의 정치가이자 외교가였으며 유능한 경제 관료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중국의 정치 사상과 통치 규범, 경제 시스템과 신분 질서, 행정 체제와 군사 편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화 질서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만큼 큰 업적과 영향을 끼쳤다.

관중은 실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무엇 보다 백성의 삶과 관련된 경제를 중시했다. 도덕의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꺼렸다. 인물을 기용하는데 다소 도덕적 결함이 있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혔다. 관중의 행적을 기록한 『관자』의 핵심 주제도 국민이 부유하고 안정되게 잘 사는 문제다. 중국 철학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음양오행 사상이 최초로 『관자』에 나타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관중이 경제와 외교 두 분야에서 남긴 성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농경사회의 특성 상 농업을 중시하면서도 공업과 상업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았던 중국 최초의 ‘중상주의자’이자, 시장 경제와 계획 경제의 원리와 특장점을 두루 취하고자 했던 최초의 ‘정치경제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백성이 가난하면 마을과 집을 쉽게 떠나기 마련”이라며 “그들이 집을 떠나면 통치자를 능멸하고 법을 어기게 되니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다. 국민 경제 안정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을 관중은 정확히 보았던 것이다. 다산 ‘목민심서’의 ‘목민’이 『관자』 첫번째 편명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관중은 또한 140여 개 나라가 할거했던 춘추시대에 국제 질서의 규범과 기준을 확립한 탁월한 외교가였다. 관중은 세금을 내리는 교역을 자유화 하는 등의 방법으로 내부를 먼저 안정화 한 뒤 경제원조를 통해 주변국과 동맹을 맺어나갔다. 결국은 9차례의 ‘국제정상회의’를 열어 제나라 중심의 지속가능한 질서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관중과 『관자』는 당대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교가 국교 수준으로 올라가면서 역사 속에 묻혀 재평가될 기회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이 본격화된 이후 『관자』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만약 조선에서 공맹과 함께 『관자』도 정치학 교과서로 썼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한글 번역본 기준으로 거의 900쪽에 달하는 『관자』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처해 있는 어려운 경제 상황과 국제 정치적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자신이 어린 시절 말을 기르는 노동자였으며 장성해서는 장사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전장에서는 도망을 치기도 했던 문제적 인물이자 탁월한 경세가였다.

『관자』는 2700년 전 살았던 관중의 행적과 말, 사상과 정책을 기록한 중국 고전이다. ‘한중철학회’의 김필수 동국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네 명의 학자가 2002년 국내 최초로 완역한 후 개정을 계속하고 있다.

<정치-경제-민생>

1. 어떻게 민심을 얻는가

1-1) 관중은 “정치가 흥하려면 민심을 따라야 하고, 민심을 거스르면 정치가 피폐해진다”고 선언한다(『관자』, 「사순」 편). 백성과 민심은 국가와 정치의 토대다. 그렇다면 민심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백성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도 군주를 위하여 근심과 노고를 감수할 것이다. 둘째 백성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백성도 군주를 위하여 가난과 천함도 감수할 것이다. 셋째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백성도 군주를 위해 위험에 빠지는 것도 감수할 것이다. 넷째 백성들로 하여금 후사가 끊기지 않고 잘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면 백성들도 군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도 감수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 지도자와 국가가 반드시 따라야 할 ‘사순’(四順), 즉 정치의 4가지 덕목이자 책무이다.

1-2) 민심을 따르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4가지 책무를 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릇 영지를 지니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그 임무가 사계절을 살펴서 농사가 잘되게 하는 데 있고, 그 직분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가 가득 차도록 하는 데 있다. 나라에 재물이 많으면 멀리 있는 사람도 오고, 토지가 모두 개간되면 백성이 머물러 산다”고 관중은 말한다(「목민」 편). 백성의 생활과 경제 문제를 잘 다스리면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창고가 가득 차면 예절을 알고, 입을 옷과 양식이 풍족하면 영광과 치욕을 안다” (「국송」 편). 관중에게 정치와 경제의 길은 다르지 않다. 국가 경영에서 경제의 중요성의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2. 산업별 클러스터를 탄생시키다

백성과 나라의 창고를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파격적인 ‘사농공상’ 정책을 펼쳤다. 사농공상 정책은 군인과 선비, 농민, 공인, 상인 등 4개의 계층집단이 각자 자신들의 직업과 임무에 따라 지정된 공간과 지역에 모여 살도록 한 것으로서, 직업과 계급의 귀천에 대한 구분이 아니라 ‘선택과 집중’ 그리고 분업화를 통해 전문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같은 업종의 사람들을 서로 모여 같이 살게 하여 서로 경험을 공유하거나 그 전문성을 높히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품과 유통과 촉진, 서비스와 기술의 학습과 전승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업 분야에 대해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공인들을 한 곳에 거주하게 하면 이들은 네 계절의 상황을 살펴서 노동력의 쓰임을 계산하고, 물건의 쓰임을 요량하고 자재를 비교하고 협동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이 일에 매달려 사방에 물건을 퍼뜨립니다. 이런 일로써 자제들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일하고, 서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그 기술을 비교합니다.” 이렇게 아담 스미스가 1776년에 쓴 『국부론』에 훨씬 앞서서 관중은 사농공상 직업별·산업별 분업화와 전문화의 이점을 주장하고 정책으로 실행에 옮겨 보였다.

“…분업과 클러스터를 통해 지식(사), 농업(농), 공업(공), 상업(상)의 생산성을 동시에 늘리자”(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 238쪽)는 관중의 산업 클러스터 전략과 정책은 제나라의 산업 생산력과 생산성에 엄청난 증대를 가져왔다. 사마천이 쓴 『사기』 「화식열전」에 “제나라의 방직기술이 매우 뛰어나서 전국에 관, 띠, 의복 등을 공급한다”고 기록될 만큼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제나라의 비단 직물산업이다. 제나라의 수도 린쯔에 설치된 직조 클로스터 한 곳에서 생산된 비단만으로 제나라 전체의 수요를 감당함은 물론, 여러 제후국에 수출할 정도로 관중의 산업 클러스터 정책은 효율적이었다. 이 정책의 출발점이 바로 사농공상 정책이었다.

3. 시장을 중시하고, 관세를 낮추다

제나라의 지역 특화 산업 클러스터에서 쏟아져 나온 물품과 상품을 원활한 유통과 수출을 위해 관중은 시장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했다. 『관자』 「승마」 편에서 “시장은 재화 유통의 중심지다… 시장은 (그 나라의) 치란(治亂)을 알 수 있는 곳”이라고 한 바와 같이 관중은 시장을 한 국가의 치란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자 경제 시스템으로 보았다. 그는 국가 내부적으로는 내수 기반의 상품경제를 자극하여 성장시키고자 한 ‘시장경제주의자’였고, 국가 간 교역에서는 관세를 낮추어 "물이 골짜기로 고이듯" 여러 상품들을 제나라의 시장에 모이게 하고자 한 ‘자유무역주의자’였다. 관중은 바다를 끼고 있는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여 어업과 소금업은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하게 각종 규제를 풀어주었고, 다른 나라들의 상인들이 세관에 등록을 하면 세금을 아예 면제시켜 주어 교역을 촉진하고 장려하였다. 어류와 소금을 제외한 다른 수출 상품들 또한 단일세 제도를 실시하여 세관에서 한번 세금을 매긴 상품들은 시장에서 두번 세금을 매기지 않았다. 그 반대로 수입 물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관중은 제나라를 국제교역과 경제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객주(중국에서 객주를 이르는 말)를 설치하여 외국 상인을 유치하였다. 제나라 전국 30리마다 외국 상인이 머무를 수 있는 객잔을 개설하였다. 객잔에서는 하나의 수레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본인의 식사를 제공하였고, 세 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말의 사료를, 5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을 붙여주었다. 관세 혜택을 넘어 파격적인 지원을 해준 것이다. 여러나라의 물품과 상인들이 물밀 듯 제나라로 몰려 들었다.

4. 제철업과 소금업으로 국부를 증진하다

관중은 제철업과 소금업 같은 핵심 산업은 국가 관리 아래 두어 국가 재정을 국가 스스로 충당하게 하는 동시에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국민들의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이 마저도 국가가 철과 소금의 소유권과 사업권, 그리고 이윤 모두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자원의 소유권을 가지되 경영과 운영권은 민간에게 나눠주어, 그로부터 남는 이윤을 국가와 민간이 일정 비율로 분배하는 ‘민관 협력 모델’을 구사하였다. 이 결과, 당시 철이 출토된 산이 3,609개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제나라의 제철업은 융성할 수 있었다.

경제적 약자를 존중하고 전체적인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곡물과 같은 주요물품의 수급조절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개입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예비식량 비축제도를 도입, 풍년기에 국가가 곡식들을 대량으로 미리 사두어 시장에서의 곡식 가격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곡식 공급의 과잉이나 미달로 인한 가격의 급격한 변동을 제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중은 ‘부상대고’라 불린 거대 사업자들이 식량이 부족한 해에 식량을 사재기 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국내 산업과 교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파격을 서슴지 않은 관중이지만 이와 동시에 부의 편중이나 경제적 불평등 같은 시장 기능의 왜곡과 오작동으로 인한 부작용에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관자』 「치미」 편에 이르기를 “힘센 사람이 주옥을 가지고 있고, 머리좋은 사람이 주옥을 조정할 수 있어서 주옥의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귀한 것을 천하게 만들고, 천한 것을 귀하게” 만들게 되면 “홀아비·과부·독신자·노인이 생계를 살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부의 지나친 쏠림을 경계하고 ‘균부’를 중시한 것이다.

5. 물가와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다

‘균부’, 즉 부의 적절한 분배와 균형을 위해 관중은 계획에 의한 경제 관리를 매우 중시했다. 그중 핵심이 물가 관리와 세금 정책이었다. “군주가 물가를 올리고 낮추는 일을 장악하고 해마다 3/10의 양식을 비축할 수 있으면, 10년이면 반드시 3년의 여유 양식이 생깁니다”(「승마수」 편). 관중은 내수뿐 아니라 제후국 간 교역수지에도 신경을 썼다. “계획에 의한 경제 관리의 물가 기준을 통해 각 제후국의 물가 기준과 고르게 합니다. 물가가 낮으면 우리나라의 상인들이 물가가 높은 다른 나라에 물건을 팔기 위해 그곳으로 나가고, 물가가 높으면 다른 나라의 상인들이 몰려와 이익을 독점하려고 할 것입니다” (「승마수」 편).

계획에 의한 경제 관리의 두번째 항목은 세금이다. 관중은 농토의 비옥도에 따라 세금을 달리 했다. “그러므로 땅의 우열을 구별하여 세금 징수의 기준을 정하면 백성이 옮겨 다니지 않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거두어들인 풍부한 세금으로 척박한 땅의 부족한 것을 채우며, 사계절의 물가를 조절하여 시장을 열고 닫는 것을 장악하면, 백성이 고향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마치 네모난 물건을 평지에 세우는 것처럼 안정될 것입니다. 이것을 계획에 의하여 경제를 관리하는 방법이라 합니다”(「승마수」 편).

비옥도뿐 아니라 작황에 따라서도 차등을 두었다. 연간 소득의 10%를 국가에 내는 것을 기준으로 풍년인 해는 매년 15%, 수확이 일반적인 경우에는 10%, 낮은 등급의 해는 5%를 걷었고, 흉년이면 세금을 면제하는 탄력적인 과세제도를 운용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부의 균형잡힌 배분을 꾀하였다. “나라에 일이 있으면 백성에게 비용을 거두지만, 일이 없으면 백성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승마」 편).

세금조차 내기 힘든 취약계층에 대해서는 제나라판 ‘뉴딜정책’이라 할 만한 대대적인 공공근로사업과 경기부양책을 펼쳐 보호하였다. 관중은 “만약 큰 흉년이나 가뭄 또는 홍수를 당한 해라서 백성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조정에서 궁실과 활터를 수리하게 하여 아주 궁핍한 사람들은 품팔이라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궁실과 활터를 수리하는 일은 보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의 구휼정책을 시행하는 것입니다”(『관자』 「승마수」 편)라고 제 환공에게 정책 제안을 하였다.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시장국가와 복지국가를 유연하고도 치밀하게 융합한 통합국가 모델을 이미 2700년 전에 설계하고 실행해 보인 것이다.

<외교-국제관계>

1. 내부를 튼튼히 한 뒤 외치로 나서다

환공이 말했다. “백성의 거처가 정해지고, 직업이 생기면 내가 천하 제후들과 회맹하는 일에 종사하려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관자가 대답했다. “아직 가능하지 않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아직 우리가 베푼 시책을 편안하게 여기지 않습니다”.(『관자』 「소광小匡」 편)

관중의 권고를 들은 환공은 백관들을 모아놓고 법령을 반포했다. “세금은 100종에 1종만 걷고, 고아와 어린아이에게는 형벌을 시행하지 않고, 고기잡는 것은 때를 정해 허용하고, 관문은 심사만 할 뿐 관세를 물리지 말고, 시장은 등록만 할 뿐 세금을 걷지 말고, 인근의 나라에는 진실과 신의를 보여주고, 멀리 있는 나라에는 예의를 보여주라 하였다. 이를 실행한 지 몇 년이 흐른 뒤, 제나라로 귀부하려는 백성이 마치 밀려드는 파도와 같았다.”(『관자』 「패형覇形」 편)

관중과 환공은 제나라를 최강국의 반열에 올리고, 그를 발판삼아 여러 제후국들을 평정하는 대업을 먼저 내부를 튼튼히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국민의 세금 부담을 덜고, 약자들을 보살피고, 경제적 자유도를 높이고, 이웃 국가와 우호 관계를 다지니 불과 몇 년 만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제발로 찾아드는 선진국이 되었다. “무릇 천하를 다투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 얻는 것을 먼저 다툰다… 천하의 대중을 얻는 사람은 왕업(王業)을 이룰 수 있고, 그 반을 얻는 사람은 패업(覇業)을 이룰 수 있다”(「패업覇業」 편).

2. 경제원조로 외교 기반을 닦다

환공이 내정을 정비하고 관중에게 물었다. “내가 이제 제후들의 일에 나서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아직 안됩니다. 아직 이웃 나라도 우리와 친하지 않습니다. 천하의 제후들 일에 나서려 하시면 이웃 나라들을 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국어』 「제어」 편)

또 관중이 “신은 제후들이 이익을 탐할 때 그들과 함께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어찌 사신을 통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과 무늬 있는 비단을 제후에게 보내고, 제후는 무늬 없는 비단과 사슴 가죽으로 보답하게 하지 않으십니까?”하고 진언하자 환공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과 무늬 있는 비단을 제후에게 보내고, 제후는 무늬없는 비단과 사슴 가죽으로 부답하니, 이에 명령이 천하에 시행되었다.”(「패형覇形」 편)

전쟁의 목적은 내 편으로 만들거나 적국을 굴복시키는 것이지 적의 영토와 국민들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다. 관중은 제나라의 압도적인 경제력을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와 동맹, 즉 ‘회맹’(會盟)을 맺는 데 썼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과 무늬 있는 비단을 제후에게 보내는” ‘경제적 원조’를 통해 제나라의 “명령이 천하에 시행”되게 했다. 즉 경제 외교를 통해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관철시킨 것이다.

경제 원조와 같은 비군사적 수단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개입’에 나섰다. 관중이 주도한 춘추 시대의 국제 질서는 ‘힘’을 기준으로 하되, 전국 시대처럼 “군사적인 무한경쟁은 배제하는 특이한 국제관계 체제였다”(『춘추전국이야기』, 1권). 제나라는 약소국에 대해서는 “100승(乘)의 수레와 1000명의 병사와 함께 연릉을 기나라에 책봉하고, 100승의 수레와 1000명의 병사와 함께 이의를 형나라에 책봉하고, 500승의 수레와 5000명의 병사와 함께 초구를 위나라에 책봉”하는 등 병탄하거나 굴복시키지 않고 반대로 땅과 병사를 내주어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나라의 국가적 이익과 국제 질서의 확립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구체적 행동에 나섰다. 당시 주 왕실과 제나라의 가장 큰 위협은 남쪽의 초나라였다. 초는 주 왕실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王)이라 칭한 독립 왕조를 자임했던 만큼, 주와 제의 입장에서 언젠가는 격돌할 수밖에 없는 숙적이었다. 기원 전 666년, 오랜 대치 끝에 초나라가 송나라와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송나라를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여 초토화했고, 정나라의 두 물줄기를 가로막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농토를 수몰시켰다. 관중은 “병사를 일으켜 남쪽의 송나라와 정나라를 보존시키고 나서” 초왕과 만나 “정나라의 성과 송나라의 수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도록 제 환공에게 권고하였다. 초나라와 직접 격돌하는 대신 군사를 송과 정으로 파병하여 국체를 유지시켜 주었고, 초나라에 대해서는 “초나라가 만일 응답해 오면 우리가 문도(文道)로 그들에게 명령하는 것이며, 초나라가 만일 응답해 오지 않으면 마침내 무력으로 그들에게 명령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최후 카드를 제시하였다. ‘문도’란 제나라의 개국조인 강테공의 저술로 알려져 있는 『육도』 「문벌文伐」 편에도 나와 있는 계책으로서 무력을 동원하여 싸우지 않고 적을 이기는 방법이다. 관중과 제 환공은 결국 “남쪽으로 내려가 초나라를 정벌했다.”

이처럼 관중과 제나라는 외교적 해결을 중시하였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명분을 필요 충분하게 쌓은 후에야 비로소 전쟁에 나서 승리 가능성을 극대화하였다. “일을 도모함에 주관이 없으면 막히고, 일에 준비가 없으면 패(廢)하니, 이 때문에 성왕(聖王)은 충분히 준비하는 데 힘쓰고, 신중히 때를 지킨다.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때에 맞춰 군대를 동원하고, 때가 되면 전쟁을 거행한다.”(「폐언」 편) 일단 군사적 행동에 나서기 시작하자, 관중과 제 나라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거침이 없었다. “각국 제후와 군사를 동원한 병거(兵車) 회맹이 여섯 차례, 평화적인 승거(乘車) 회맹이 세 차례로,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제후를 규합했다. 환공이 제자리로 돌아와 패업을 이루고 나서 다시 종경을 매달고 연회를 열자, 관자가 말했다. ‘이것이 신이 말하는 참된 즐거움입니다.’”(「패형」 편)

3. 9번의 국제정상회의 주도, ‘가치 동맹’으로 지속가능한 국제질서를 만들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의 패자가 되게 하고, 단 한번에 천하를 바로잡았다(一匡天下)”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관중과 제 환공의 패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단 한번의 싸움으로 31개 나라를 굴복시켰을 만큼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큰 나라의 준주는 환공을 섬기기를 마치 신하와 종이 주인을 받들듯이 하고, 작은 나라의 제후들은 환공을 만나면 기뻐하기를 마치 부모를 대하듯 했다.”(「소광」 편)

다음 차례는 새롭게 수립한 제나라 주도의 국제 질서를 안정화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기초한 국가 관계는 지속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 경제적 지원이 끊기면 관계도 따라서 단절될 수 있고, 상대국에 대해 군사력 우위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관중은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제후국 간 회맹의 수준을 뜻과 명분을 함께 하는 ‘가치 동맹’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대표적인 것이 이후 ‘중화 질서’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게 될 ‘존왕양이’(尊王攘夷)였다. 관중과 제나라는 남·북에 위치한 이민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주 왕실을 받들고 중원의 제후국들의 국체를 보존하는 것을 자신들이 중심이 된 ‘회맹 질서’의 명분으로 삼았다. 기원 전 661년 적족이 형나라를 공격하자 관중은 이를 “융적의 마음은 승냥이, 이리 떼와 같아서 그 욕심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반면 여러 하족의 나라들은 의당 친해야 하니, 어려움을 보고 버려둘 수 없습니다”라고 국가 간 분쟁이 아니라 북방 이민족과 중국 화하 민족 간의 갈등과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여러 제후국들을 외부의 적에 맞선 동족(同族)으로 간주한 것이다. 663년에는 북쪽의 산융이 연나라를 공격하자 “적인들이 무도하여 천자의 명을 어기고 작은 나라를 침범했습니다. 우리는 천자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이들을 구원하라고 명했습니다”(「소광」 편)라고 하여 회맹의 명분과 가치가 ‘존왕’에 있음을 명백히 했다. 이렇게 향후 중국 대륙이 분열되었을 때나 통합을 이루었을 때 모두 변함없이 2500년 넘게 존속될 중화 질서의 근간이 관중에 의해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관중과 제 환공은 회맹이라 불린 도합 9번에 걸친 국제 정상회의를 통해 춘추시대 열국들을 같은 가치에 기초한 국제 질서 내로 규합하였다. 그리고 회맹의 내용을 5조로 구성된 조약문으로 명문화하여 회맹 질서를 제도화함으로써 춘추시대 평화와 안정을 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결과,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천하가 환공을 먼 나라의 백성은 부모처럼 우러르고, 가까운 나라의 백성은 흐르는 물처럼 좇았다.”(「소광」 편) 관중이 연출하고 환공이 주연한 제나라의 패업과 패권은 오래 가지 못했으나 그들이 세운 가치와 규범은 이후 제자백가를 거쳐 중국 정치 사상과 통치 규범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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