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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마다 실시되는 인도 총선이 11일 시작됐다. 인구 13억 5000만명 중 등록 유권자만 9억명이 넘는다. 투표 기간만 39일이고 투표소가 1백만 곳에 이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유권자 9억명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전체 보다도 더 많다. 투표율도 낮지 않아 5년 전 총선 때는 6억명 이상이 투표했다.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축제’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공용어만 22개인 나라가 하나의 유기체로 작동
인도는 29개 주(state)로 구성된 연방국가다. 한 개 주의 크기가 대체로 면적이나 인구 면에서 우리나라 전체와 비슷하다. 흰 피부의 아리안 계통부터 남부지방의 검은 피부 남방계까지 다양하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이 있다고 할 정도다. 공용어만 22개다. 조금만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해도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다. 문화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크고 복잡한 나라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작동한다. 인도에 살아 보면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연방 헌법과 선거제도의 덕이 큰 것으로 보인다. 부임 초에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던 게 사실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13억명이 무슨 선거냐?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선거는 거대한 인도 연방을 하나의 나라로 유지시켜주는 아주 실질적인 제도라는 생각이다.
인도에선 5년마다 한 번씩 실시되는 연방의회 총선, 그리고 매년 몇 개주에서 실시되는 지방의회 선거를 통해 13억 5000만 인구의 관심 사항이나 이해관계가 조정되고 반영된다. 그리고 정당들의 정치적 조정과 타협 능력도 탁월하다. 웬만한 민주주의 국가 보다 낫다. 인도의 선거와 정당정치를 우리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외교관으로서 인도 총선 경험하는 것은 큰 축복”
인도 총선은 거대한 축제이기도 하다. 39일 선거 기간 중에는 인도 전역이 선거벽보나 플래카드로 도배된다. 수십만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가 도처에서 열린다.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평화적이다. 인도 외교부의 아시아 담당 차관은 필자에게 “외교관으로서 인도의 총선을 경험하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만큼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경험이라는 이야기다.
투표자만 6억명이 넘는 선거를 관리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실제는 보통 일이 아니다. 북으로는 히말라야의 산골 오지 마을에서 남으로는 타밀나두주의 바닷가 어촌 마을까지. 그래서 하루에 다 투표를 할 수가 없어 4월 11일부터 5월 19일 까지의 기간 중 7개 날짜를 투표일로 정했다. 543명의 하원 의원을 뽑는 543개 투표소를 지역별로 나누어 이 일곱개 날짜 중 하루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정한 날짜에 투표하게 한다.
투표방식은 100% 전자투표다. 투표소에 비치된 전자투표기(EVM)에 그 지역 후보자의 번호, 이름, 사진이 쭉 나열되어있다. 그중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자 옆의 버튼을 눌러 저장하는 방식이다. 간단하고 단순하다. 개표는 5월 23일 하루에 전국적으로 동시에 이뤄지고 바로 결과가 발표된다. 투표에는 39일이 걸리지만 개표에는 단 몇 시간이면 충분한 것이다.
전자투표 제도는 1990년대 말 처음 도입된 이후 지속적으로 보완되었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종이에 기표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는데 투개표 부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전국의 투표함을 모두 개표하는 데만 일주일여 시간이 걸렸다.
전자투표 시비 일자 ‘해커톤’까지 시도
전자투표제가 도입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소프트웨어는 인도 국영 전자회사의 엔지니어 그룹이 만들었다. 이 그룹 외부의 누구도 이 기계 및 기계에 기록된 파일에 접근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투표기는 배터리로 작동되며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번 선거에는 150만대 이상의 전자투표기가 사용된다. 각 투표기에는 최대 2천표(각 투표소의 등록 유권자는 1천5백명을 초과하지 않음)와 64명의 후보자가 기록될 수 있게 되어 있다. 선거관리 요원과 보안 요원들이 소형 트렁크에 든 전자투표기를 투표소로 운반하기 위해 도보로 기차로 배로 이동하는 모습이 언론에 많이 보도된다. 코끼리와 낙타가 동원되기도 한다. 어떤 오지에 사는 유권자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정부의 노력이 돋보인다.
문제는 신뢰성이다. 해킹 가능성이 있거나 오작동이 일어난다면 선거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웬만한 국가들도 기술 수준으로야 얼마든지 실시할 수 있지만 사회적 신뢰에 막혀 아직 본격적으로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정당 내부 경선 등 소규모 선거에는 실시하고 있지만 전국 단위 선거에서 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인도의 경우도 최근까지도 시비가 있었다. 2017년 현 여당(BJP)이 압승한 주 의회 선거 때 야당들이 여당에 의한 해킹 의혹을 제기하면서 종이 기표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30건 넘는 소송이 있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선관위는 결국 해킹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모든 정당 대리인들이 참석하는 ‘해커톤(Hackaton)’을 열자고 했다. 해커톤은 해커와 마라톤의 합성어로 컴퓨터 전문가들이 한 장소에 모여 마라톤 하듯 쉬지 않고 특정 문제 해결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나 주요 야당들이 모두 해커톤을 회피했고 2개의 군소정당만 참여했다. 문제가 확인되지 않자 흐지부지됐다.
또 인도 최고법원은 5년 전 모든 전자투표기에 유권자가 자신이 누구에게 기표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용지 추적 기능을 갖춘 프린터 설치를 명령했다. 투표가 진행되면 후보자의 일련번호, 이름 및 상징을 포함하는 종이슬립이 인쇄되고 투명창에 7초 동안 노출된 상태로 보인다. 이후 이 슬립은 자동으로 절단되어 밀봉된 상자에 떨어진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보조장치를 만든 것이다. 투표가 끝나면 투표정보를 보유한 장비는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관리위원회의 안전띠와 일련번호가 쓰인 왁스로 봉인된다.
전자투표는 그동안 세 번의 연방 총선, 113번의 주 단위 선거에서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정당이나 전문가 집단이 해킹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어느 누구도 이를 실제로 증명하지 못했고 최고재판소의 판결도 동일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전자투표제도에 대한 신뢰가 정당과 국민들 사이에 완전히 자리 잡은 점이다. 선거 관리에 들어가는 시간과 인력 그리고 비용도 크게 절감되었다. 인도가 선거에서 이룬 전자혁명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전자투표 시스템은 세계 최고, 그러나 신뢰가 부족
투표방식은 기술 수준이나 사회적 신뢰 확보 정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오히려 후진적으로 보이는 지금의 투표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오랜 정치 문화의 산물이다. 일본이 투표자가 용지에 후보자의 이름을 직접 적어넣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도가 전자식을 채택한 데는 워낙 인구가 많고 지역별 문화가 다양해서 용이한 투표관리를 위한 측면이 컸다. 한국 선관위가 개발해놓고 있는 전자투표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물론 인도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국은 국민과 정당들이 동의하기만 하면 세계적 투표 제도를 만들 수 있다. 인도가 하나의 예시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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