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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인사이트] 자유와 평등 - 유발 하라리와 빌게이츠는 왜 생각이 충돌하는가?, 디지털시대가 불러온 근대가치의 혼돈

이관호 (미래가치 SD)

2018.10.19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등’은 사실로 존재하는 가치인가, 아니면 당위의 가치인가? 표현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해야 하는가, 아니면 불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해야 하는가? 두 진술 각각으로부터 풀어보려 한다.

인간은 불평등하다. 교과서의 서술은 다음과 같은 논리였다. “신석기시대까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평등한 사회였는데 청동기시대 들어 잉여생산물을 차지하는 다툼과 권력이 나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원시시대가 평등했다고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농경, 사냥, 어로, 채집 등 분야 별로 리더가 있었는데 다만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분산적이었다는 것이 심층적인 이해로 보인다. 중세 신분제 사회 이후, 특히 산업화 이후 계급의 지위가 ‘집중’되고 ‘누적’됨으로써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모든 면에서 열등한 계급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인간이 전면적으로 평등했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일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다른 이 말에 익숙하다. 이 익숙함은 어디에서 빚어진 것인가.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세계의 영원법으로부터 인간사회의 자연법 개념을 도출했다. 이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것과 유사한 이성을 가지고 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무를 이론화했다.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적·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세력은 자연법을 의무 중심에서 권리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누구나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프랑스혁명의 천부인권은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말했다. 서구에서 ‘법 앞의 평등’은 이 개념들을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두 갈래로부터 풀어본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실제 불평등하지만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를 이론화, 법제화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평등은 역사 속에서 ‘자유’와 떨어뜨려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혁명의 주도세력들은 신분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이때의 평등은 ‘자유를 다함께 누릴 권리’를 의미했으며 두 가치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는 자유와 평등의 공존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역사의 고비 마다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론적 전략이 필요해졌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조건이 달성된 후에 실질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여성, 흑인, 성소수자 운동도 표면상 ‘평등’을 외치지만 궁극적으로 해방 즉 ‘자유’를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20세기 중반 이후 하버드의 존 롤스(1921-2002)와 로버트 노직(1938~2002)은 이 두 가치를 토대로 정의 논쟁을 펼쳤다. 롤스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최소 수혜자들(the least advantaged)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 줄 경우에만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정당화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 평등한 분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롤스가 말하는 ‘최소 수혜층’은 장애인, 소수민족 등 사회적 소수를 말한다. 그게 정의라는 것이다. 반면 노직은 ‘과다한 세금’에 대해 “노동의 결과를 빼앗는 것은 사실상 그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어떤 일을 명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이는 개인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매우 부도덕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 논리가 극단으로 가면 재분배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롤스의 정의와 노직의 정의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중이다. 최근 들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이 두 사람 논쟁의 근간을 흔들면서 논의가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들의 논쟁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디지털화라는 시대의 급격한 변화이다. 유발 하라리는 최근 출간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다가올 디지털 문명에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 예언했다. AI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는 인류는 의사결정의 자유를 내려놓을 것이며, 더 나아가 디지털 독재로 인한 데이터 접근의 차별이 평등의 가치까지 파괴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빌 게이츠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21세기를 위한 21세기 제언’ 서평에서, 식량이나 에너지 생산과 같은 인류 생존과 직결되는 데이터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공유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게이츠는 하라리가 데이터의 종류를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쇼핑 이력과 진료 기록을 수집하는 주체와 수집의 목적은 각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페이스북과 SNS가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하라리의 시각에 대해, 가족과 세계 각지의 친구들을 연결시키는 SNS의 장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편 디지털화에 긍정적인 다른 주장을 검토해보면, 탈중앙화라는 리눅스와 해커 윤리에 충실할 경우 디지털 문명은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구희상 SD - [시사 인사이트]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평등인 시대가 온다 - 리눅스와 해커에 담긴 디지털시대의 ‘뉴 모럴’)

4차 산업혁명 물결은 순식간에 세상을 먹어치울듯한 기세다. 산업을 바꾸고 지식을 바꾸고 도시를 바꿀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이다.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벌어진 하라리와 게이츠의 논쟁은 흥미롭다. 하라리 주장처럼 디지털 혁명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부정적으로 작용할까, 아니면 하라리의 생각이 과도하다는 게이츠의 말이 맞을까. 이런 인문학적 논쟁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인문학적 토대 없이 4차 산업혁명 앞에 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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