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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인간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도구를 개발하고 사용하여 왔다. 돌을 던지는 것보다 더 정확히 상대를 맞추기 위하여 활을, 더 많은 것을 옮기기 위해 수레를, 더 잘 보기 위해 안경과 현미경과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활판 인쇄술과 증기기관 발명은 중세 농업사회를 근대 산업사회로 전환하는 기반이 되었다. 도구와 기계는 우리의 신체적 한계, 노동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풍요의 이면엔 그림자도 짙었다. 기계 보급 과정에서 수공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노동자를 실직자로 내몰았다. 대중의 저항이 사회 불안을 불러오고 거기에 적응하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이 등장했다. 때론 기계가 대량살상무기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기계를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과 유전자 공학으로 대표되는 바이오 기술은 또 한 번 인류사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현재 인간이 신체적 한계, 지능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를 극복해야 하고 결국 인류는 죽음이라는 질병을 극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랜스 휴머니즘(Trans humanism)의 입장이다. 안경을 끼고 장기를 이식하듯이 결국 인간은 유전자를 조작하고 로봇 다리를 붙이고 인공지능을 두뇌에 연결하여 초인류라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고 본다.
문제는 이것이 새로운 인간 불평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 휴머니즘적 입장에 따르면 과학기술이라는 것이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비용이 싸져 대중도 혜택을 보기 때문에 불평등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영생도 단지 개인적인 선택과 능력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러나 디지털이라는 기술의 질적 전환 과정에서 뛰어난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갖고 태어난 인간과 보통 인간이 같은 인간으로서 평등하다는 가치가 과연 유지될까? 인류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이 존귀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 확대되어 온,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존중하며 평등의 가치를 추구해온 역사라는 의미부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초인류는 인류와 과연 같은 종인가? 인간의 몸은 과연 끊임없이 개선될 필요가 있는 물체인가? 근본적 질문이 꼬리를 문다.
또 문제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다. 인간은 여러 측면에서 인공지능에 미치지 못한다. 인간이 인공지능의 아바타가 될 수도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이세돌의 앞에 앉은 아자황은 인공지능의 아바타였다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똑똑하고 인간보다 쓸모가 더 있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인공지능의 지시를 받는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인공지능 등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가 피할 수 없는 유일한 진실은 죽음이다.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라, 바보처럼 묵묵히 나아가라)라는 말로 유명한 2005년 스탠퍼드대 연설에서 스티브 잡스는 죽음에 대하여 이러한 말을 남겼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 ‘죽음’에 직면해서야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평등일 수도 있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의 존재를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라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없다. 미래는 따라가는 시간이 아니라 앞서가는,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실행해 가는 시간이다. 희망과 기대를 품는 인간에게만 미래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물체, 기계, 동물,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미래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오 휴머니즘(Neo humanism)은 인간이 도구와 기계를 발명하고 사용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 존재가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라고 본다. 도구와 기계가 발명되고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늘어나면서 인간은 덜 힘들게 노동하고 더 많은 것을 누릴 기회를 발견하였고, 더 많은 문화 활동이 가능하게 되면서 예술품과 같은 도구를 만들었다. 문명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기, 청동기, 철기 문명을 거쳐 농업 문명, 산업 문명을 거쳐 지금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문명으로 가는 단계이다.
결국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계와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진 특징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역시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창조성에서 나아가 인류 공동의 유산(지식, 문명) 위에 새로운 것을 같이 협력하여 만들고 나누는 공동 창조성(Cocreativity)이 인류를 생존시킨 원동력이었다. 새로운 것은 인간의 존재적 한계를 인정하고, 이러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불편함을 알아야 개선할 수 있다. 인공지능 로봇화 된 인간이 불편함을 알 수 있을까? 그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몸이 있고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몸이 없고 이성만 있는 인공지능 같은 새로운 인간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살 것인가? 자신의 무한 확장일까? 그 무한 확장은 기술로 증강된 슈퍼 인간과 보통 인간의 투쟁을 가져올 것인가?
인간은 도구와 기계를 사용하며 발전하고, 인간성의 새로운 측면을 개발하고, 문화와 예술 등 인간만의 영역을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도구와 기계가 인간의 손에 주어진 것이었다면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에 주어진 도구가 되어야 한다. 도구를 숭배하고, 도구를 따라가려 할 때 우리는 도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더 서로에 공감하고 공동의 행복을 위해 공동의 창조성을 더 발휘해야 하는 절박함이 더 필요해지는 미래, 그 앞의 현재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글은 이종관 성균관대 교수가 여시재에서 진행한 “디지털 문명과 인간의 운명” 강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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