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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를 통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 독설가인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서구에서의 포퓰리스트 극우정당의 득세. 잇따라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정치 현상을 보고 이를 서구식 민주제도의 실패로 규정하는 시각이 곳곳에서 제기됐다. 특히 중국에서는 서구와 다른 중국 특색의 정치제도가 오히려 경쟁력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점에서 중국을 이끌고 있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더욱 중요해졌다.
전직 黨校 교수가 쓰는 중국공산당 이야기
서구 정당과의 차별점
서구에서 ‘정당’은 정치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대표하기 위해 만든 조직체다. 다원주의를 기본 신념으로 하는 이 정치 체제에서는 양당제 혹은 다당제를 통해 정당 간의 경쟁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서구 정당은 민주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역할을 했다. 민주국가 내지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서구 국가들은 정당정치를 수용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정당 간의 지나친 경쟁으로 중장기 이익을 정책에 반영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되고 있다. 이에 대한 경고는 이미 유명한 학자들로부터 제기됐다. 로베르트 미헬스는 “모든 현대 정당은 권력의 특성으로 인해 두 가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는데 전체주의와 종파주의가 그것”이라고 했다. 같은 정치이념을 공유하고 또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조직체가 정당이라는 의미에서 중국공산당도 서구 정당과 마찬가지로 정당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이 만들어진 배경이 다르고, 이에 따라 목적·기능·조직구조·기본신념 등 여러 면에서 중국공산당은 서구 정당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당(黨)’이라는 표현은 논어에 처음 등장한다. 공자는 “군자는 모이기는 하되 당으로 뭉치지지는 않느니라(君子群而不黨)”고 했다. 당이라고 하면 사리사욕을 위해 뭉치는 불량한 무리를 일컫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송나라 때 처음 등장한 ‘정당’이란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송나라 신종 때 사대부들은 신구 정당으로 갈라져 정책 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이는 결국 권력투쟁으로 변질됐다. 이후 정당이란 단어는 금기어가 됐다.
정당이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청나라 말기다. 아편전쟁 이후 갈팡질팡하던 청나라에선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넘어 입헌군주제 도입까지 과감한 정치 실험이 계속됐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막을 내렸다. 이런 대혼란을 틈타 지역마다 군웅이 할거하면서 300여 개의 정당과 정치조직이 난무했다. 정파 간 권력투쟁으로 나라가 사분오열됐다. 서구 열강의 침탈이 더해지면서 당시 중국이 세계 지도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극단적인 위기감이 팽배했다.
중국공산당은 이런 배경에서 출현했다.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과 민족의 새로운 부흥이었다. 이런 거대 목표는 모든 정치자원을 동원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 사회의 거의 모든 엘리트를 당으로 흡수했다. 현재 8800만 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들을 국가 기구와 사회, 군에 배치해 당·국가·사회를 하나의 통일체로 통합했다. 이런 차원에서 중국공산당의 일당제는 엘리트를 선발하고 통합하며 대중을 동원하는 유력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전체 인구의 6~7%인 엘리트를 당원으로 흡수했다. 효율적인 엘리트 선발과 교체 시스템, 통일된 신념체계 및 엄격한 기율 관리를 통해 중국공산당은 파벌주의를 극복하고 강한 동원 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의 정당은 당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지만 일원화된 체계 속에서의 정당은 인재 충원의 채널로 볼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엄격한 도덕 기준과 업무 능력, 당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당원을 선발했고 사회 각계 엘리트를 당내로 흡수했다. 서구 시각으로 보면 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실현 자체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중국에선 어떻게 가능했을까. 중국의 정당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 제도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다. 2000여 년에 걸친 고도의 중앙집권 정치체제의 경험에서 중국공산당의 실체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는 동(銅)으로 된 못이 아홉 줄로 박혀 있는데 각 줄은 아홉 개의 못으로 돼 있다. 중국어에서 아홉(九)은 오랠 구(久)와 같은 발음이다. 황제와 연관된 건물의 대문은 전부 이렇게 만들어졌다. 황제에게만 허용됐다. 진시황 이래 역대 황제들의 통치 목표인 ‘장치구안(長治久安, 사회 질서가 장기간 안정되고 평화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자금성을 둘러싼 황성에는 6개의 대문이 있다. 대명문(大明門·청나라는 대청문으로 개칭함) 외의 다섯 개 문의 이름에 전부 안(安)자를 써서 동안문(東安門)·서안문(西安門)·장안우문(長安右門)·장안서문(長安西門)·북안문(北安門)으로 명명했다. 자금성 앞을 동서로 관통하는 거리 이름도 장안가(長安街)로 지었다. 장치구안 철학이 깔린 명명법이다. 장치구안이라는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사상적·제도적 작업이 뒤따랐다. 대동(大同) 사상, 천인합일(天人合一)과 대일통(大一統) 사상, 과거제로 요약된다.
천인합일과 대일통 사상이 기본 이념
중국 역대 왕조는 대동사회를 이상으로 내걸었고 천인합일과 대일통 사상을 대동사회 실현을 위한 정치·사회질서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과거제는 가치규범과 정치·사회질서 실현을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
한(漢)나라의 동중서(董仲舒)는 천명론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결합한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사상체계를 완성했다. 이 체계 위에 군주 정치의 기틀이 마련됐고 이는 근현대 중국 정치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동중서의 사상은 수직적 사회·정치구조를 정당화했다.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 관계의 위상을 규정했다. 양(陽)에 해당하는 군주·아버지·남편은 음(陰)에 속한 신하·자녀·아내의 통치자로 위상을 부여했다. 이어 천인합일 사상과 대일통 사상으로 살을 붙였다.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로서 인간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고 이 중심으로 세상은 통일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배의 정통성이 출발한다. 한족이든 북방의 유목민족이든 대일통을 실현하기만 하면 ‘정통’ 왕조라고 인식하는 사고방식이다.
미국 학계에서도 최근 대일통 체제의 정치 전통이 신해혁명으로 끝난 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이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 대일통의 전통이 장제스(蔣介石)의 중화민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거쳐 시장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중국에 계승됐다는 것이다.
대일통 세상의 정신문화도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바로 유학이다. 이에 따라 유학만 남기고 기타 학설은 전부 폐지돼야 했다. 이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태학(太學)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웠다. 유학을 보급하고 유학으로 세상을 통합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구상을 제도화하기 위해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했다. 귀족과 지방관들이 추천한 자들이 대상이었고 기본 과목은 유학의 경전이었다. 시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체 엘리트 집단을 동질화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동중서의 제안을 한(漢) 무제(武帝)가 받아들여 국가 시책으로 삼았다. 시험을 통한 인재 선발 방식은 수·당(隋·唐)시기에 이르러 과거와 관료제로 발전했다. 과거는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개별 응시가 가능하며 공경대신(公卿大臣)이나 주관장관의 특별 추천을 반드시 받을 필요는 없었다. 이에 따라 거의 모든 엘리트를 왕권에 흡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소농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사회는 과거제를 통해 발탁된 엘리트 집단에 의해 통합됐고 정치 경쟁은 금기시돼 왔다. 형식상 중국공산당은 중국 정치 전통의 핵심축인 일원 중심주의와 과거제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인재 충원 방식은 과거제를 모태로 하고 있고 일원 중심주의 전통과 일당제의 관계도 이질적이지 않다.
국가를 파탄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그러나 1905년 과거제도 폐지와 더불어 사회통합 메커니즘이 와해됐고 군주제의 몰락에 이은 다당제와 다원화된 정치 문화는 결국 무정부주의와 대혼란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은 자의든 타의든 과거제와 관료제를 대체하여 국가를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경쟁이 없는 일당제는 일원 중심주의 전통과 맥이 닿아 있다. 또 당이 국가를 직접 장악하여 강력한 동원 능력을 갖춤으로써 국가 재건과 부흥의 꿈을 가능케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말해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유교식 왕조 정치가 근대화된 과정에서 조정(朝廷)의 역할을 수행하게 됐고 과거제가 현재의 당과 정부의 간부 선발 방식으로 변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은 제도와 제도화를 구별하면서 “제도화란 제도가 내포한 문화적 가치가 내면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제도를 만들었다고 제도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도는 수단일 뿐이고 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문화적 가치야말로 핵심이며 영혼이다. 서구의 어떤 제도를 베낀 뒤 그 제도가 갖고 있는 문화적 가치를 내면화하지 않고서는 그 제도가 뿌리내릴 수 없다. 중국공산당과 일원중심주의 국가 거버넌스 방식이 중국에 잘 먹히는 이유도 이런 요인과 관련 있을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강력한 내부 통합을 통해 당내 종파 투쟁과 파벌주의는 피했으나 문화대혁명처럼 전체주의 함정에 빠져 국가를 파탄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던 뼈아픈 경험도 겪었다. 현재 중국공산당은 당내 제도화를 통해 종파주의와 전체주의 두 함정을 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시장화와 더불어 디지털 기술의 보급 등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몸부림들이다. 시장경제 도입과 더불어 엄격하던 당의 기율이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당은 여전히 효과적으로 통합돼 있다. 이러한 중국공산당의 개혁이 어디까지 성공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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