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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주도 경제건설, 더 이상 맞지 않아… 규제 철학 자체를 바꿔야 경제도 성장한다”
‘규제 개혁’은 새로 들어서는 정부마다 사활을 걸겠다며 덤벼들었다가 임기 말이 되면 오히려 규제 총량 증가라는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는 이슈다. 역대 모든 정권이 똑같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라고 다를 것 없다. 신산업이나 새로운 서비스에 기존 규제를 면제해 주는 ‘규제 샌드박스’,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규제를 면제해 주는 ‘네거티브 방식’의 적용 대상을 넓혀가자는 정도가 공감대로 남아 있다. 왜 이런 반복이 계속되는 걸까?
여시재는 우리 산업의 활로를 찾기 위한 미래산업 연구를 진행하며 규제 개혁의 해법을 모색해왔다. 그 일환으로 지난 정부에서 규제개혁 업무를 총괄하는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으로 일했던 강영철 한양대 특임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그는 언론인(매일경제 경제부장), 기업인(풀무원홀딩스 전략경영원장) 출신으로 규제 기관(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을 관장해 본 이력을 갖고 있다. 규제를 만들어내는 곳과 규제를 받는 곳, 규제 생태계를 논평하는 곳에서 모두 일해본 경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민간 자율에 맡긴 뒤
문제가 발생하면 강하게 처벌”
Q. 규율하는 입장과 규율의 대상이 되는 입장에서 모두 일한 경험이 있다.
A. 행정부 관료들은 규제를 당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훈련이 잘 안돼 있다. 나는 풀무원 미국 법인장으로 미국에서 식품 공장을 직접 건설하고 운영하면서 미국의 규제 시스템을 체감했던 적이 있다. 미국 규제 시스템의 핵심은 민간자율에 맡기고 문제가 발생하면 강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한국과 굉장히 다르다.
“규제 개혁을 정치선전 수단 삼으면
절대 성공 못해”
Q. 역대 정권의 규제 개혁의 특징과 성과를 간단히 평가해달라.
A. 김대중 정부 1년 차인 1998년도에 행정규제기본법이 도입되었다. 이후 5년 단위로 모든 정부가 규제 개혁을 국정 어젠다로 설정했다. 김대중 정부는 50% 규제 줄이기를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는 핵심 덩어리 규제를 정비했다. 이명박 정부는 기업친화적 규제 개혁을 표방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이 참여하는 규제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모든 정부가 규제 개혁을 국정 어젠다로 설정하고, 규제 개혁을 했는데 아쉽게도 모두 캠페인성 개혁에 그쳤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때의 ‘전봇대 사건’이다. 규제 개혁을 상징화시키면서 뭔가 업적을 포장하려다 보니 규제의 근원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이게 가장 큰 취약점이다.
cf. 전봇대 사건
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 때 이 당선인의 발언에서 비롯된 규제 개혁 해프닝. 이 당선인은 전남 목포 대불공단에서 전봇대 2개 때문에 화물차들이 움직이는데 어려움이 있는데 관련 부처들이 모두 책임을 미루느라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규제 폐해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했다. 이 전봇대 2개는 이 당선인 발언 며칠 만에 뽑혔다. 하지만 전국에 700만 개가 넘는 전봇대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대로다. 전선을 땅밑에 부설하는 ‘지중화’를 하자면 비용이 15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규제 개혁이 정치 선전의 대상이 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OECD 규제 지수 下位 5개국에
한국만 20년째 포함돼
Q. 한국의 규제 수준은 어느 수준인가? 국제적인 평가는 어떤가?
A. 가장 대표적인 지수가 OECD가 발표하는 상품시장규제 지수, 즉 PMR(Product Market Regulation) 지수다. 정부 개입에 의한 시장 왜곡, 진입장벽의 측면에서 규제 수준을 평가하는 지표다. 2018년도 가장 최근의 상품시장규제지수에 따르면 OECD 국가 중에서 터키, 캐나다, 룩셈부르크, 벨기에 다음으로 한국이 다섯 번째로 규제가 강한 나라로 조사됐다. Worst top 5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20년 전에도 Worst top 5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통계가 처음으로 발표된 1998년부터 5년 단위로 통계가 계속 나오는데, 한국 순위가 1998년도 5위, 2018년도 5위이다. 그 사이에 1~4위는 다 바뀌었다. 1998년에 한국보다 더 나쁜 나라는 그리스, 헝가리, 체코, 포르투갈이었는데 2018년에는 이 나라들이 모두 한국보다 상품시장규제지수가 낮은, 경쟁력 있는 국가로 탈바꿈했다. 98년 이후 모든 정부의 규제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의 글로벌 이노베이션 인덱스(Global Innovation Index, GII)에 따르면 2019년에 한국은 인적자원 1위, R&D 1위, ICT 인프라 1위이다. 그런데 규제 환경이 45위이다. 노동 환경은 107위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GII 경쟁력은 한국이 세계 상위 11위다. 인프라는 좋은데 이러한 규제 환경 때문에 우리가 세계 순위 5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이냐? 좋은 인프라를 갖췄고 인풋(Input)도 좋은데 최종 경쟁력은 이에 못 미친다. 자원을 가공하고 생산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지표의 경쟁력이 낮은 것이다. 규제와 제도의 문제다. 모든 종류의 국가경쟁력지수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잠재성장률 하락은 숙명 아니다
규제 환경 바꾸는 것이 관건”
Q. 경제성장률이 낮은 이유를 규제에서도 찾을 수 있는가?
A. 선진국이 겪는 잠재성장률 하락을 숙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규제 환경 개선, 상품시장 규제 지수 개선, 시장의 작동을 보다 원활하게 하고 민간주도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본다. 디지털 전환이 가져오는 세상의 변화를 앞장서 이끌어 나간다면, 그래서 새로운 사업 기회(New Business Opportunity)를 다른 나라 보다 빨리 활용할 수 있다면 잠재성장률은 높일 수 있다. 바이오 헬스, 드론, 핀테크, AI 등 한국이 기술력에 비해 활용하지 못하는 성장의 기회가 널려 있지 않은가? 규제 환경이 문제인 것이다.
“국가가 시장 관리하는 방식
더 이상 안 맞아”
Q. 법 제도 또는 규제라는 것이 산업과 시장을 형성하고 시장의 질을 관리하는 기능이 있다. 좋은 의도로 만든 제도, 규제가 역기능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196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는 국가가 시장을 관리하는 기능이 작동했다. 우리가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정부가 자금도 대줘가며 기업들 키우고, 시장도 키우고, 국가 경제도 키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국가가 더이상, 한국과 같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국가가 컨트롤하는 것은 넌센스인 상황이 되었다. 국가 중심 시장 관리는 유효기간이 지난 구시대 발상이다.
초기에는 먹혔던 방법도 지금은 더 이상, 오히려 시장의 발전을 저해하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다. 진입규제는 초기에는 산업을 키우는 데 좋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 진입장벽이 된다. 택시의 예를 보자. 새로운 모빌리티 서비스의 가능성이 열렸는데 기존의 법규가 진입장벽의 역기능을 하고 있다. 국가 주도로 만들어 놓은 시장의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다 보니까 새로운 경쟁 동력을 얻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12월 10일 ‘지능정보화기본법’이 시행됐다. 인공지능 시대를 열자고 정부가 만든 법률이다. 일종의 촉진법, 발전법이다. 법을 보면 지능정보화 종합 계획을 수립한다고 나온다. 지금 AI 시대를 정부가 주도적으로 종합 계획을 세워서 실현할 수 있는가? 각종 진흥법의 단골 메뉴가 있다. 정부가 종합계획을 주기적으로 세우고, 관련 인력을 양성하고 산업진흥을 담당할 기관을 설립한다. 70~80년대에나 먹혔을 방식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제정된 유통산업발전법은 초기에는 발전법으로 기능했다. 그래서 대형마트가 유행하면서 국민의 편익이 제고되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대형유통업 억제법으로 변질되었다. 궁극적으로 정부가 시장을 만들고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규제 안 하면 시장이 날개를 펼친다. 국가 주도 경제 건설의 마인드와 함께 시장의 잘못은 국가가 고치겠다는 교정주의적 마인드 이 두 개가 한국의 규제 환경을 굉장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한우 티본스테이크가 왜 없었는지 아는가?”
Q. 규제조정실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
A. 민생 규제 4000건 정도를 개선한 일이다. 그중 자영업자, 음식점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과제가 70% 정도 됐다. 대표적인 예가 한우 티본스테이크이다. 티본스테이크를 규제 개선 이전에 먹었다면 모두 외국산이었다. 한국에서는 티본스테이크 컷을 할 수 없었다. 한우를 그려 놓고 각각의 부위 살을 다 적어 놓았는데 티본스테이크라는 것이 없었다. 몇 십 년 전에 만들어 놓은 종이 한 장짜리 규제였다. 한 도축업자가 규제 개혁 신문고를 통해서 접수를 해서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한우 티본스테이크를 드실 수 있다. 주유소에 편의점과 커피숍이 생긴 것도, 꽃집에서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것도 규제 개선 성과이다.
또 하나는 규제학회 및 한국개발연구원과 행정연구원이 공동으로 네거티브 규제체계 도입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일도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네거티브 규제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한 20년이 되었는데, 네거티브 규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보고서가 없었다. 연구를 통해 네거티브 규제의 실체에 대해서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산업과 관련된 예시로는 화장품법을 들 수 있다. 이 법이 2013년에 바뀌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K-뷰티 산업의 성공과 관련이 있다. 이전에는 화장품 원료로 쓸 수 있는 것이 지정되어 있었다. 법이 바뀌면서 원료로 사용할 수 없는 물질을 지정하고 나머지는 “어떤 원료를 쓰건 상관없다. 대신 안전성은 기업이 책임져라”는 전형적인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개선되었다. 화장품 종류가 다양해지고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화장품 산업의 약진이 본격화됐다. 통계로도 입증된다. 화장품 회사가 12년 1450개에서 19년에는 7580개로 7년 새 다섯 배나 늘었다. 전통적인 무역역조 산업이 화장품 산업이었다. 2009년 1.7을 기록했던 수입/수출 비율이 2012년 0.92로 겨우 균형을 맞추었다. 이것이 19년에는 0.19로 크게 낮아졌다. 2009년 수입이 수출보다 2배가량 많았는데 19년에서 거꾸로 수출이 수입보다 5배나 많아진 것이다. 중국의 한한령으로 타격을 입은 2017년 이전 2014년에서 16년까지의 생산 증가율은 17.9%나 됐다. 2009년~2013년간의 평균 생산 증가율 11.1% 보다 크게 높아진 것이다. 2013년에 화장품법을 개정할 때 전면적으로 바꾼 것도 아니었다. 단지 원료에 대한 규제를 바꾼 것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엄청난 산업적 발전으로 연결됐다. 핵심은 네거티브 규제의 도입이다. 신산업 관련 규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유전자 검사도 할 수 없는 것만 나열하고 모든 것을 서비스할 수 있는 규제로 바꾸고, 인간대상 연구도 할 수 없는 것만 규제하고 나머지는 풀어준다면 한국에서 제2, 제3의 화장품 산업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기회를 지금 모두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제 개혁은 상시적 국가 어젠다 되어야”
Q. 그래도 여전히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는 크지 않다. 규제 개혁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A. 캠페인성 규제 개혁 방식이 문제다. 뭔가 하겠다고 천명하고 캠페인성으로 국정 어젠다화 시키니 효과가 없다. 규제 개혁은 (반짝) 국정 어젠다가 아닌, 상시적 국가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 모든 정부가 당연히 해야 될 일이 바로 규제 개혁이다. 우리도 규제개혁위원회를 만들었지만, 미국은 백악관에 정보규제실(Office of Information and Regulatory Affairs, OIRA)이라는 조직이 있다. 규제 개선이라는 업무를 지속적인 정부 활동(Ongoing government activity)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규제 문제의 가장 큰 특성은 규제는 당하는 사람만 그 내용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규제를 개혁해도 그 규제로 피해를 보았던 사람만 효과를 체감하지 그 이외의 사람은 모른다. 어느 날 “주유소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네? 햄버거 팔기 시작하네? 편해졌네” 이런 느낌은 갖지만 규제 개선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은 모른다. 규제는 굉장히 개별성이 강하기 때문에 그 효과를 체감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 굉장히 파편화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규제 개혁의 성과를 알리는 게 굉장히 어렵다. 그러니까 규제 개혁을 가지고 성과를 자랑하겠다는 정부는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근원적인 규제 개혁을 통해서 규제 환경 지수를 개선하는 것이다. OECD PMR(상품시장규제) 지수를 최악 5위에서 10위로 개선한다거나, 글로벌 이노베이션 인덱스에서 규제 환경 45위를 베스트 10위로 올린다는 객관적인 성과 목표를 내걸어야 한다. 이것을 제시하지 않고 추적하지도 않으니 정부가 호기롭게 규제 개선의 성과를 국민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 이것이 어렵다면 다른 방법도 있다. 글로벌 100대 핀테크 기업 중 한국에서는 사업이 불가능한 게 31개나 된다. 디지털과 바이오헬스 분야 100대 기업 중 75%는 한국에서 사업화가 불가능하다. 규제 때문이다. 차라리 이것을 모두 가능하게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달성하면 국민이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지표는 개선되지 않는데, 개별적인 규제를 예시하며 “이것을 바꿨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봤자 냉소적인 반응 밖에 얻을 것이 없다.
“경제 관련 법령 전체를 놓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뜯어고쳐야”
Q. 결국은 법령 정비일텐데. 규제라는 관점에서 법령을 일률 정비하는 일이 가능한가?
A.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5600개 정도의 법령이 있다. 이중 경제와 관련된 게 절반 정도 된다. 이것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뜯어고쳐서 규제의 구조 자체를 근원적으로 바꿔야 한다. 포지티브 규제는 네거티브로 규제로 바꾸고. 정부가 심판자 역할을 하는 조항이 있으면 심판자 역할을 없애는 쪽으로 바꾸는 식으로 규제 전체를 검토해서 바꿔야 한다.
세 가지 정도 기준이 있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법률이 정하지 않은 것은 모두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국제 기준 규제 최소성의 원칙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생명바이오 분야는 규제 수준이 국제적으로 아주 세다. 국가생명윤리위원회가 모든 연구 과제에 대해서 일일이 승인하는 그런 체제에서는 생명바이오산업에 미래가 없다. 미국, 영국, EU 수준과 비교해서 이들 나라가 허용하는 것은 모두 허용해야 한다. 세 번째는 생명안전 법률과도 관계가 되는 것인데,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다시 짜야 한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 보험요율을 한국은 국가가 정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은 국가가 정하지 않는다. 사업장 단위로 산업재해 보험료율이 책정된다. 개별 사업장에서의 실제 재해 발생 빈도에 따라 정한다. 따라서 사업장이 산업재해 보험료율을 낮추기 위해 투자를 해서 산업재해의 비율이 떨어지면 투자한 만큼 보상이 나온다. 보험료가 줄어드는 거다. 반면 당장 투자 여력이 없다면 높은 산재 보험료를 계속 내면서 근로자들 보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안전과 관련된 법률도 얼마든지 사업장 단위의 선택권을 보장해 주는 방식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일률적용이 아니라 사업장별로 사정에 따라, 혹은 근로자들의 선택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물론 법정 근로시간 초과에 대해서는 할증률을 세게 매겨야 한다. 시간당 임금을 200% 내더라도 50시간 이상 근로를 근로자와 합의하면 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라 함은 민간주도 경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그러한 규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 모든 법률을 재검토해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규제의 핵심은 ‘성장 촉진’이다”
Q. 미국에서 공부했고 풀무원 미주법인을 이끈 경험이 있다. 한국과 미국의 규제 시스템 차이는 무엇인가?
A. 규제의 목적에 차이가 있다. 규제 내용을 정하는 관료들의 임무 선언(Mission Statement) 혹은 규제 원칙(Regulatory Principle)이 다르다. 미국의 규제 원칙은 국민의 건강, 복지, 안전, 환경을 보호(Protect) 하면서 동시에 경제성장, 혁신과 경쟁력, 일자리 창출, 시장 경쟁을 촉진(Promote)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규제 당국자는 두 개의 임무를 갖는 것이다. 프로텍트(Protect) 하는 미션과 프로모트(Promote) 하는 미션이다. 한국의 규제는 프로모트가 빠졌다. 그냥 프로텍트만 챙기고 있다. 그 프로텍트도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일률적으로 한다. 규제에 접근하는 관료들의 자세, 국가의 자세에서 한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관료들이 일자리 창출이나 경쟁력 확보, 경제성장도 자신들의 임무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중대재해법이 이슈가 되고 있다. 중대재해법은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다. 처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좋은데 그렇다면 그 처벌 이전 단계의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처벌을 강하게 하려면 사전적인 규제를 풀어주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해. 그런데 사고가 나지? 그러면 너희들 죽었어” 이런 식으로 규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미국식 법이다. 사전규제를 최소화해 민간의 자율권을 보장한 후, 문제가 발생했고 그 원인이 회사에 있으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앞 단의 규제는 그대로 놔두고 뒷 단의 처벌까지 강화하는 게 문제다.
“안전사고 관련 규제 강화한다고
안전사고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기업이 법령을 지키도록
유도, 감독하는 일이다”
Q. 시민단체와 소비자들은 규제 완화가 기업들에게만 이익이 된다는 시각이 있다. 안전이나 사고 관련 규제는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A.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4000건 정도의 규제 개선을 했는데 그 중 기업과 관련된 규제는 20% 밖에 안된다. 기업과 관련된 특정한 규제가 쟁점이 되지만, 한국의 법과 시행령에 따른 규제는 민생 및 자영업과 관련된 규제가 훨씬 많다. 규제 개선을 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일반 시민하고 자영업자들이 더 많다. 규제 풀면 기업만 이익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특정 규제에 한해서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대기업 규제 같은 특정 영역의 규제만이 그렇다.
안전이나 사고 관련해서 규제를 강화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한국의 산업재해 관련 법률의 경우 담당 부처가 10개, 법률이 24개가 있다. 10개 부처, 24개 법률로 산업안전을 규율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1위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면 산업재해 사망률이 줄어들까? 게다가 50인 미만 사업장은 몇 년간 유예시켜 준다고 한다. 사고가 어디서 많이 나는가? 영세 사업장 사고가 많다. 대형 사업장에서 사고가 나면 뉴스에 크게 나지만, 사고 빈도도 적을뿐 아니라 사망도 상대적으로 적다.
이천 물류센터 화재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재해 관련 법규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니다. 집행에 문제가 있다. 산업 현장에서 안전 관련 법률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관리∙감독해야 하는 정부에 책임이 있다. 규제 준수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하청 근로자가 사망했다. 법규는 2인 1조 작업이었다. 2인 1조 작업을 안 해서 사고가 났다. 법규를 지켰다면 사고가 안 일어났을 것이다. 이미 한국은 안전규제가 촘촘하게 짜여 있다. 더 이상 강화시키지 않고도 산업재해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현재의 제도를 제대로 집행하고 준수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거의 안 하고 있다.
미국에 있을 때 식품공장을 건설했다. 시의 안전담당관이 우리 공사현장에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공사현장에 있었다. 하루 종일 와서 지휘∙감독을 하니까 오히려 우리는 그 혜택을 봤다. 법규나 상황을 잘 모르는데 미국의 공무원이 와서 안전을 다 책임져주니까. 1년 6개월 정도 공장 건설을 했는데 사고 한 건 안 났다. 규제는 만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행, 특히 안전과 관련된 규제는 집행의 문제이다. 한국은 집행과 준수의 문제가 있다. 이천 화재사건도 이천시 공무원들이 불이 나기 전날도 방문했다. 단순 방문 가지고는 안된다. 안전규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확인하고 불시점검해서 감독해야 한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는 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있다 해도 안전사고는 줄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강화된 법률을 만드는 것보다 현재 있는 법규를 제대로 준수하도록 유도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대기업만을 타깃으로 한 규제는
이제 그만둘 때 됐다”
Q. 대표적으로 개선되어야 하는 규제 몇 가지만 꼽아달라.
A. 기업규제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 우리 기업규제는 대규모 기업집단의 행위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규모 기업집단의 행위 규제를 도입할 때는 명분이 있었다. 경제력 집중 문제다. 그러나 대기업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행위 자체를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규제하는 게 제일 좋은 방식이다. 최근 미국의 공정거래위원회가 페이스북(Facebook)에게 몇 가지 사업을 매각하라고 결정을 내렸다. 기업이 자유롭게 경영활동을 하고, 그 결과 독과점이 형성되면 강력하게 명령해서 중단시키는 것이다.
기업의 잘못은 규제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기업은 악이고 중소기업은 선이라는 관점에서 규제를 디자인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독과점 행위, 사익편취 행위, 담합 등은 기업 규모와 관계없다. 모든 기업이 유혹을 느끼게 돼 있다. 이러한 것들을 규제하는 보편적 기업규제는 타당하다 할 수 있으나 대기업만을 타깃으로 한 규제는 이제 종식시켜야 한다.
“공정경제 3법에 균형이 없다”
Q.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공정경제 3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가장 큰 문제는 균형감 상실이다. 기업의 일탈을 규제하고자 하면 일탈 없이 잘 경영하는 기업은 보호해 주어야 한다. ‘3% 룰’ 같은 것을 도입하려면 반대로 잘하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
균형의 상실은 다중대표소송제에서도 나타난다. 기업 잘못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 소송을 쉽게 하는 게 요체인데, 전형적인 사후규제의 하나다. 사후규제를 강화할 때는 사전규제를 풀어주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
실제로 규제 효과에 의문이 되는 것도 있다. 사익편취 규제 강화다. 총수 일가 지분 30% 이상 기업에서 20% 이상 기업으로 사익편취 대상 기업을 확대하자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우리는 총수 일가 지분 29.9% 기업을 만들어 일감 몰아주기를 버젓이 행하는 것을 많이 봐왔다. 이것을 20%로 낮추면 일감 몰아주기가 없어질까? 19.9%로 지분율을 낮춰 비싼 가격에 물건을 사주는 것, 물량을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시장의 꼼수를 정부의 규제가 일일이 시정할 수 없다. 사익편취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 규제가 대부분의 선진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지분율에 상관없이 잘못된 행위는 규제해야 한다. 그래서 공정거래위원회의 기능을 대기업 규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공정거래 규율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상법 개정안의 경우는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심사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규제심사를 받지도 않고 중요한 기업규제가 도입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가 법률을 만드는데 가장 큰 취약점이 국민의 의견수렴 절차를 제대로 안 거치는 것이다. 프랑스가 디지털공화국법을 만들 때 민간의 개선 건의가 1만 5000건이 넘었다. 상법 개정과 관련해서 과연 정부는 충분한 공론의 장을 거쳤는지 의문이다. 소위 답정너식 도입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경제단체를 초청해서 의견을 들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단체의 의견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런 방침이니 (원죄가 많은) 기업이 양보하고 따라와라”는 식이다. 경제의 틀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법안을 이처럼 통과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고, 규제의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미국서 공장 운영할 때
소방서 공무원이
최소 한 달에 한 번 불시 방문하더라”
Q. 미국의 경우 예방활동 중심으로 안전 규제를 한다는데 어떤 방식인가.
A. 법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게 예방활동이다. 준수하는지 안 하는지를 일 년에 한 번 가서 보고 알 수 없다. 제가 미국에서 공장을 운영할 때 소방서에서 최소 한 달에 한 번씩 불시에 우리 공장을 방문한다. 이게 예방활동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선을 권고한다. 딱지를 떼는 게 아니고 경고를 하고 심각하면 일주일 내에 예고 없이 와서 지적사항을 고쳤는지를 본다. 계도 위주, 예방 위주의 규제 준수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런 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적발 위주의 행정을 하는 것이다. 범칙금을 물린다고 준수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안전과 관련되는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다.
“영산강 유역 8만 1000여개 사업장 담당하는
환경특별사법경찰 6명인 게 말이 되나”
Q. 안전 관련 공무원이 늘어나야 되겠다.
A. 안전 관련 공무원은 늘려야 한다. 중앙정부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인력을 축소시키고 현장 공무원(Field Officer)을 대량으로 양성해야 한다. 영국 사례를 들자면, 산업재해와 관련해서 ‘Health and Safety Executive(HSE)’라는 조직이 있다. 이 HSE는 산업안전과 관련된 모든 법규를 집행하는 기구다. 노동부 법률, 복지부 법률, 원자력 안전 등 모든 부처의 법률의 집행을 HSE에서 다 맡아서 한다. 정부 각 부처에 산재돼 있는 산업재해 관련 인력을 다 모아서 한꺼번에 관리하는 거다. 10개 부처에서 각각 나올 이유가 없이 한 조직에서 나와서 모든 법률을 준수하고 있는지, 오로지 집행과 준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준수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테크닉 중 하나가 위험 기반 현장검사(Risk Based Inspection)다. 가장 위험도가 높은 사업장을 파악해서 중점적으로 관리한다. 정보가 한 군데로 모아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한국도 이런 식의 제도 개편이 없으면, 산업재해사망률 1위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영산강유역환경청에서 8만 1000여 개 사업장의 환경오염물질 배출을 감시하는 환경특별사법경찰이 단 6명에 불과하다. 1인당 1만 3000여 개 사업장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가? ‘환경특별사법경찰’이라는 멋있는 말로 포장해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리 책임을 부여하면 그 책무를 다할 수 없다. 이게 한국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고가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수 있다.
“규제개혁위원회를
공정거래위 위상으로 격상시켜야”
Q. 심의기구인 규제개혁위원회를 독립 행정위원회(예: 공정거래위원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유가 무엇인가?
A. 한국은 규제 개혁과 관련한 제도적 틀과 거버넌스 구조라는 측면에서 OECD 베스트 프랙티스 국가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있고 규제영향분석과 비용관리제를 도입한 것은 선진사례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실제는 취약하다. 규제영향분석이 의무화됐지만 하나하나에 대해 심의하지 못한다. 내용이 부실하다. OECD에서 한국이 규제영향분석 모범국가이니 샘플 몇 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몇 개를 검토했지만 도저히 베스트 사례라고 OECD에 보낼 만한 정도의 깊이 있는 규제영향분석을 찾지 못해 보내지 못한 경험도 있다.
규제개혁위원회는 국무총리가 공동위원장이고, 민간인 위원장이 있고, 비상임위원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전체회의를 통해 규제조정실에서 만든 안건을 심의하고 있다. 토론을 통해 규제조정실의 판단을 뒤엎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중요규제로 심사하는 규제 건수가 전체 신설 규제에 비해 10%가 채 되지 않는다. 이래서는 규제 개선이 안 된다.
현재와 같은 비상임 위원회 조직으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다. 신설 규제 심의도 바쁜데 기존 규제에 까지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 정부가 규제 개혁에 진지하다면 규개위를 확대 개편해서 독립행정위원회로 격상시키고 상설 사무국을 독자적으로 구성해서 그 역할을 다하게 할 수 있다.
규제는 국민의 삶의 질뿐 아니라 국민의 부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가가 세상의 잘못을 하나하나 뜯어고치겠다는 교정주의적 시각을 버리고 민간 자율을 최대한 보장하되 결과에 대해 민간이 책임지게 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바꾸는 규제 재창조 작업에 당장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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