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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차 아미티지-나이’ 리포트 분석
- 北 문제 해결에 일본 협조 유도 필요해
바이든 시대 아시아 태평양 구상을 엿볼 수 있는 2020년판 아미티지-나이 리포트가 발표되었다. 아미티지-나이 리포트는 조시 W.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한 리처드 아미티지와 클린턴 행정부 국방부 차관보였던 조지프 나이를 필두로 미일동맹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초당적 리포트다.
보고서는 2000년 처음 발표된 이래 중요한 시기마다 미일동맹의 존재 의의와 역할, 협력의 방향성을 제시해 왔다. 이후 2007년, 2012년, 2018년에 이어 이번에 다섯 번째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는 미일 양국의 리더십이 교체된 시기에 맞춰 발표된 만큼 바이든 시대 미일동맹, 나아가 아시아 태평양 전략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이번 보고서 작성에는 아미티지와 나이 이외에도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부소장, 쉴라 스미스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등 대표적인 ‘재팬 핸즈(미국 내 일본 전문가 그룹)’가 참가하였다.
바이든 정부,
중국 등의 도전에 맞서
‘미일 협력’ 강화해야
부제인 ‘글로벌 어젠다를 위한 대등한 동맹(An Equal Alliance with a Gobal Agenda)’에서 드러나듯이 이번 보고서는 미국과 일본이 글로벌 의제에 대응하는데 동등한 협력을 이어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보고서를 읽으며 맨 처음 인상에 남는 것은 ‘미일 협력은 미국에게 있어 초당적 합의가 된 핵심 분야’라고 전제한 부분이다. 바이든 시대에도 미일 동맹이 중시되는 경향은 변함이 없을 듯하다.
보고서는 서문에서 아베 정부에서 추진한 평화안보법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 협정(CPTPP)의 타결, 인도 태평양 구상 등을 미일 동맹의 대등한 협력이 가능하게 한 주요 기반으로 평가한다. 트럼프 정부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리는 사이 일본이 글로벌 어젠다를 주도하였고 이는 일본에 대한 워싱턴 일부가 가진 우려 섞인 시선(군국주의 일본의 부활과 같은)을 불식시켜 주었다고 부언하였다.
글로벌 리더십의 공백을 메꾼 일본의 성과를 바탕으로 바이든 시대 글로벌 리더십의 운영을 설계할 수 있다는 인식이 엿보인다. 보고서는 미일 양국이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양국은 중국의 도전을 관리하면서 글로벌 전략, 경제, 기술, 거버넌스의 4대 전략과제를 협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맹이라고 단언한다.
미일 동맹에 대한 이러한 ‘찬사’의 이면은 일본에게 더 많은 방위 분담을 요구하기 위한 복선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오프쇼어 밸런싱(Offshore Balancing)을 명명했던 오바마 정부 이래 미국은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하는 군사 프레젠스를 축소하는 대신 지역별 동맹국 혹은 협력국가들의 지역방위 부담을 증가하는 방침을 지속해 왔다. 트럼프 정부의 방위비 분담 요구도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이 주창하던 ‘자유롭고 열린 인도 태평양’이란 개념을 수용한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그만큼 일본의 동맹 부담을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 바이든 정부에서도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혹은 인도 태평양으로 확장된 지역적 안보 질서에서 핵심적 협력자로 자리매김할 것은 분명하다. 다만 보고서는 양국에서 존재하는 방위예산의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미일 공동의 기술 개발 등을 통해 동맹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미, CPTPP 가입해야
일본과의 경제∙기술협력 강조
보고서는 이에 더해 경제기술협력을 심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역과 기술, 인프라와 에너지, 우주 등의 분야에서 양국 간 경제 협력이 기반이 되지 않으면 인도 태평양 전략은 공허하고 지속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이를 위해 미국이 CPTPP에 가입해 경제 규칙을 수립하는 데 있어 일본과 협력할 것을 보고서는 주문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이 주도한 지역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체결을 경계하며 중국 주도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 구축에 대응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CPTPP가 필수적이라고 평가한다.
보고서는 나아가 세계경제의 40% 이상을 포괄하고 있는 CPTPP가 디지털 경제의 거버넌스를 형성하는 데 있어 좋은 토대가 될 것으로 보았다.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과 2019년 9월 미-일 디지털 무역 협정보다 강화된 CPTPP의 규범들이 디지털 경제의 규칙과 규범을 형성하는 리더십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연장선 상에서 보고서는 인공지능, 로봇 공학, 생명공학, 나노 공학, 신소재, 5G 네트워킹을 포함한 새로운 기술을 지배하는 기술 표준과 규칙이 개방적이고 상호 운용성을 가질 수 있도록 미일 협력이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이에 더해 보고서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인프라와 경제 발전, 그리고 에너지와 기후변화에 있어 일본이 글로벌 협력의 핵심 행위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글로벌 리더십 공백 메꿔준 일본에
더욱 대등한 책임과 기대 표명
결론적으로 아미티지- 나이 리포트는 대등해진 일본에게 더욱 대등한 책임과 기대를 표명하는 보고서이다. 미국이 지난 4년간 실기해 왔던 글로벌 어젠다의 리더십을 빠른 시간 내에 복구하기 위해서는 같은 시간 동안 그 자리를 대신해 왔던 일본의 협력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헌법 9조를 핑계로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동맹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평화안보법제의 제정 및 개정으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법적 기반을 갖춘 일본은 더 이상 미국이 요구하는 동등한 부담, 대등한 협력에 대한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 미국은 글로벌 차원의 리더십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 일본이 필수불가결한 협력자임을 선언했고 그만큼의 역할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실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베 정부가 추진한 미일 동맹은 평화안보법제 제정 및 개정 이후 상호운용성의 향상을 위해 협력을 긴밀히 해 오고 있다. 이와 더불어 2019년 4월 개최되었던 미일 안전보장협의위원회(통칭 미일 2+2 회의)에서는 미일 동맹이 인도 태평양 지역의 평화, 안전 및 번영의 초석임을 확인한 바 있다. 상원 군사위원회는 이미 내년도 국방수권법(NDAA)에 태평양억지구상 항목을 신설하고 22억 달러, 약 2조 4천억 원을 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인도 태평양 지역에 있어 중러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 주둔을 강화하는 것도 주요 내용이다. 태평양 억지 구상은 2014년 크림반도 사태 시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던 유럽 억제 이니셔티브를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5월 의회에 제출되었던 태평양 억지 구상의 초안에는 인도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존재와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인프라와 물류 개선, 동맹 및 협력국과의 상호운용성 강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태평양 억지 구상을 통해 지역 내에서 중국의 패권적 지위 획득을 제한한다면 이를 위한 수단으로 미일 동맹이 부담해야 할 부분은 증대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라도 미일 동맹을 글로벌 협력의 수준에서 확고히 할 필요가 미국에겐 존재한다. 대등한 동맹으로서 일본이 지불해야 할 비용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美∙日 이익 교차점 찾아야
올림픽, 디지털 통상, 기후변화 등에 기회
그렇다면 대등한 만큼 책임이 증가하는 미일 협력 사이에서 한국은 어떤 외교를 전개해야 할까. 미일 동맹이 글로벌 어젠다를 주도하고 중국을 역내 경쟁자로 억제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국 외교는 주변에 머물 가능성이 적지 않다. 미일 동맹의 협력 방향을 통해 미국의 전략적 이해를 가늠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일 양국과 한국의 국익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키워나가야 한다.
한국의 역할이 유의미할 첫 번째 영역은 올림픽 외교이다. 한국은 이미 평창올림픽을 통해 한반도 화해 분위기를 일거에 조성한 경험이 있다. 다가올 도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필사적인 일본, 2022 동계 올림픽을 준비 중인 베이징에 이어 2024년에는 LA 올림픽이 열린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중재하고 지난 1년 정체되었던 한반도 정세의 전환을 꾀할 수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북한의 경계가 높은 만큼 도쿄 올림픽 참가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선수단에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는 방법 등을 통해 전격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베이징 올림픽과 LA 올림픽에 남북한 공동 참가를 타진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올림픽 개최라는 미중의 공통된 과제를 테마로 미중 경쟁 속에 한반도 문제가 매몰되거나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디지털 통상 분야의 협력도 필요하다. 아미티지 – 나이 리포트에서도 경제협력의 핵심 이슈로 디지털을 꼽았다. 일본은 2019년 오사카에서 개최된 G20 에서 국가 간 데이터 유통의 규범을 정하는 ‘오사카 트랙’을 제안하였다. 일본은 안전하고 신뢰할만한 데이터 이동의 국제규범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하는 데이터 통상의 블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개정된 북미자유무역협정인 USMCA나 미일 디지털 무역 협정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미일 양국은 중국을 배제한 디지털 통상 질서를 구축하고자 한다. 중국의 입김이 거센 세계무역기구를 벗어난 디지털 통상 규범에 한국의 동참을 요구할 수 있다. 미일이 주도하는 디지털 무역 규범 논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함께 규범 설계에 참여하면서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고 중국과의 입장을 조율하는 능동적 대응이 요구된다.
기후변화 대응 문제도 놓칠 수 없다. 아미티지 – 나이 리포트 역시 기후변화와 에너지를 미일 협력의 마지막 분야로 꼽고 있다. 탈탄소사회로의 전환은 한미일을 떠나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한미일 3국은 모두 수소 경제를 탈탄소사회의 비전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국제에너지 기구는 2019년 보고서에서 수소 에너지가 미래 사회에 기여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각국은 과거와 달리 기술적 과제들을 극복하고 탄소 배출 없는 그린수소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18년부터 수소각료회의를 개최하여 도쿄선언을 채택하는 등 수소사회 추진을 위한 국제협력을 주도해 왔다. 바이든 당선인은 대선 공약으로 수소 경제 생태계를 포함한 청정에너지 부문에 4년간 2조 달러의 투자를 내세웠다. 2050년 경 탄소 배출 제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그린수소 생산을 위한 다양한 기술 진화가 필수적이다. 이와 함께 수소 경제 구축을 위한 기반 시설의 확대도 요구된다. 한국 정부는 세계 최초로 수소법을 제정하고 수소 경제 활성화 로드맵을 수립해 수소 경제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한미일 수소 경제 협력 등의 방안을 구체화시켜 기술 공유와 표준협력, 안정적인 글로벌 수소 공급망 구축 등을 공조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북한 문제 해결에
일본 협조 유도해야
한미일 공조 강화 필요해
한미일 공조를 강조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아미티지-나이 리포트는 미국, 일본, 그리고 협력국가들이 중국과 대응하는 과정에서 충돌 대신 ‘경쟁적 공존(competitive coexistence)’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쟁과 긴장이 지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중국과 미국이 함께 존재하는 국제질서 형성을 강조한 것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보인 상호 보복적 대립보다는 기존 국제질서 속에서 경쟁하고 견제하는 전략이 예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하기 위한 한미일의 긴밀한 대화가 요구된다. 미중 경쟁이 타이완, 남중국해 등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로 전개되지 않도록 위기관리가 중요하다. 센카쿠제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역내에서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미국으로서도 회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한미 간의 전략적 입장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재해 대응 등 비군사적인 영역에서의 안보 협력 어젠다를 통해 한미일 안보 협력을 심화시켜야 한다. 한미일 협력이 원활하지 않을 때 가장 불편을 겪는 것은 미국이다. 글로벌 협력자로서 일본의 책임이 커진 만큼 한일 관계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아울러 북한 문제 관리에서 한국이 이니셔티브를 쥐는 것 못지않게 일본의 동의와 협조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아미티지-나이 리포트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김정은 위원장은 정권의 생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북일 관계 접근은 북미대화에 회의적인 워싱턴의 분위기를 바꿀 계기가 될 수 있다. 1971년 키신저가 중국을 전격 방문한 이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른 것은 일본이었다. 닉슨 쇼크에 빠졌던 일본은 1972년 중일공동성명을 체결하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후 1974년에는 양국 간 무역협정, 항공협정, 해운협정이, 1975년에는 어업협정이 체결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수습과 아시아 전략을 재조정하던 미국이 중국과 정식 수교를 체결한 것은 1979년 1월 1일이다. 세계전략을 운영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북일 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한 문제 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한반도 화해 무드에 소극적이었던 일본은 북일 관계 개선에 목말라 있다. 아베 총리가 완수하지 못한 북한과의 납치자 문제 해결은 스가 정권을 비롯해 일본이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다. 납치자 문제의 전면적 해결 자체보다도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재개이다. 스가 총리도 김정은과 조건 없이 만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북일 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대화의 국면 전환을 도모하는 것이 한반도 운전자론에도 도움이 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당파를 초월한
미국의 대일 협력 컨센서스
바이든 행정부에게는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과 함께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일본과의 협력은 장애 없이 정책 추진이 가능한 몇 안 되는 분야가 될 것이다. 최근 바이든 당선인이 한국을 린치핀, 일본을 코너스톤으로 호명하자 양국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평가하느라 작은 소동이 있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 핵심에 일본이 자리 잡은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사실 이름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권교체 여부에 상관없이 미일 동맹, 즉 일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워싱턴의 초당적 합의 자체이다.
개인적으로 현재 워싱턴 D.C.에서 당파에 관계없는 컨센서스가 3가지 존재한다고 본다. 대중 견제, 대일 협력, 그리고 대북 불신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 문제를 관리하는데 일본과의 협력은 디폴트 값으로 존재한다. 하영선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은 올해 초 여시재와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워싱턴 싱크탱크들이나 대학의 주요 아태 연구에는 이미 깊숙하게 일본 연구비가 프로젝트 형태로 들어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전망 2020 인터뷰 https://taejaefci.org/research/792 참조) 일본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연구 지원을 통해 미국 학계에 자리 잡은 ‘재팬 핸즈’들이 자연스럽게 일본의 국가 이익을 반영하도록 미국의 아태 전략을 설계하는 구조가 안착되어 있다.
“한국서 한일 협력 말하면 친일파
미국서 남북 협력 말하면 몽상가”
최근 만난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사석에서 ‘한국에서 한일 협력을 말하면 친일파로 불리고 미국에서 남북 협력을 말하면 몽상가로 여겨진다’고 말하며 씁쓸해 했다.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한국 정부의 의지에 대해 워싱턴 대부분의 인사들은 회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가 어렵다는 강경한 워싱턴의 논리를 타개할 접근법을 제시하지 않는 한, 한국의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정책 공공외교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 내의 회의적인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미티지-나이 리포트가 보여주는 일본에 대한 당연한 신뢰에 복잡한 기분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절대적인 신뢰와 협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중 경쟁과 남북 문제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바이든 시대, 한국의 외교 공간을 유연하고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미 관계에 대한 미국의 단단한 지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미 동맹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북한 문제 해결 방법을 둘러싼 워싱턴의 뿌리 깊은 북한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채 톱다운 방식에 의존한 남북 대화, 북미 대화가 지난 4년간 계속되었다. 관료들의 의견을 중시하는 바이든 정부에서는 지속되기 어려운 모델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미일 동맹이 진화해온 발자취는 하나의 좋은 참고 사례가 될 수 있다.
30여 년에 걸쳐 구축한
미일 동맹 협력 구조
미일 동맹에 대한 미국 내의 초당적 공감대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냉전시대 극동 방위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던 미일 동맹은 탈냉전 후 양국의 동맹 재정의를 거친 바 있다. 헌법 9조로 인해 안보 공백을 가진 일본을 방위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미일 동맹은 냉전기 동안 점차 그 기능을 강화, 확대해 왔다. 1978년 책정된 미일방위협력을 위한 지침(후술할 1992년의 가이드라인과 구별하기 위해 통상 구 미일 가이드라인으로 불린다)에서 미일 동맹의 범위를 ‘극동유사’로 규정한 것이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일본의 안보 전문가 무로야마는 냉전기의 미일 안보체제를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추구하는 군사적 코미트먼트를 지탱하기 위한 광역지원 기능을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동시에 미일 안보 협력이 진전될수록 일본 사회에서는 미국과 일체화되는 일본의 안전보장 정책에 대한 대미 종속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미국에서는 헌법 9조를 이유로 동맹 협력에 소극적인 일본에 대한 불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찾아온 냉전의 종결은 극동아시아의 억지력으로서 미일 동맹이 가지고 있던 존재 의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탈냉전 시작과 함께 전개된 이라크 전쟁에서 일본은 외교적 실패를 경험한 바 있다. 자위대의 해외 파견이 불가능한 탓에 당시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일본은 ‘수표책 외교’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1992년 ‘국제연합의 평화유지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안(통칭 PKO법안)’을 제정하며 국제 공헌을 일본 외교의 주요 기둥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냉전 이후 세계에 대한 인식과 미일 동맹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미일 양국의 전략 대화가 진행되었다. 1992년 1월의 도쿄선언, 1993년 9월 클린턴 정부의 신국방계획(Bottom-up Review), 1994년 8월 호소카와 내각의 방위문제간담회 보고서(통칭 히구치 레포트), 1995년 2월 미국방부의 동아시아태평양 안전보장전략(통칭 나이 레포트), 1995년 11월 발표된 일본의 ‘신(新)방위대강’, 1996년 4월의 ‘미일안전보장공동선언,’ 1997년 9월의 미일 신(新)가이드라인(정식명칭 미일방위협력을 위한 지침)이 그러한 전략 대화의 결과물들이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미일 동맹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을 수립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미일 신가이드 라인은 1978년의 가이드라인이 ‘극동유사’로 설정했던 양국 협력의 범위를 ‘주변사태’로 변경하였다. 신가이드라인은 미일 동맹이 이후 일본 본토 및 일본 주변 해역에서의 협력에 국한되지 않고 정세 변화에 따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에서 작전 협력이 가능하도록 하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부시 행정부가 진행한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미일 동맹 협력은 더욱 공고화되었다. 고이즈미 정권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는 후방 지원활동과 이라크전쟁 이후의 평화재건활동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고이즈미 정권은 자위대의 해외 파견 활동이 미국의 무력행사와 일체화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 ‘비전투지역개념’을 이용한 입법 (통칭 테러특별법, 이라크특별법)을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비전투 지역에 한정한 자위대의 해외 파견이 더욱 확대되었고 미국의 세계질서유지에 협력하는 일본의 역할을 정립하였다. 아베 정권이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용인한 평화안보법제를 제정 및 개정하면서 미일 동맹의 대등한 협력을 위한 제도적 정비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미일 동맹에 대한 미국의 초당적 합의는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전략 대화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후반 ‘밑바닥’까지 떨어진 미일 동맹
꾸준한 전략 대화로 궤도 회복
사실 이러한 미일 협력의 발전 과정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후반 진행되었던 오키나와 주일미군 기지 재편 협상은 일본의 민주당 정권 기간 중에 혼란을 겪었고 이 시기 미국의 미일 동맹에 대한 회의적인 분위기는 상당했다. 대미 자립과 아시아 중시 외교를 표방한 민주당 정권에 대한 미국 내의 불만은 일본이 미국과의 협력에서 벗어난 독자 노선을 추구할 것이라는 경계를 확산시켰다. 이 시기 일본의 싱크탱크에서 근무하던 필자가 진행하던 미일동맹 컨퍼런스에서 한 일본인 학자는 미일 관계가 ‘밑바닥(どん底)’에 떨어졌다고 평가하기도 했었다. 이후 수립된 아베 정권의 대미 중시 노선을 환영하면서도 미국은 아베 정권의 수정주의적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2012년, 일본 전문가들은 다양한 회의체와 공동연구를 통해 일본의 입장을 미국 사회에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대부분의 논지는 아베 정권이 추진 중인 고노담화의 재검증 등 일련의 수정주의적 시도들이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논지들이 대부분이었다. 미일 동맹에 대한 양국의 신뢰는 이러한 꾸준한 노력 속에 형성된 것이다.
2013년 말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자 오바마 행정부는 이례적으로 ‘실망했다(disappointed)’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 언론에서는 실망이라는 표현의 추가를 주도한 것은 바이든 당시 부통령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한 일본인 교수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두고 그동안 일본 학계가 진행해온 대미 공공외교를 단번에 붕괴시켰다고 한탄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러한 불신과 불협화음의 시기에도 아미티지-나이 리포트를 주도한 워싱턴의 재팬 핸즈들과 일본 싱크탱크들을 중심으로 양국 간 안보전략대화는 계속되었다. 위기일수록 차분히 서로의 요구와 이해를 공유하던 양국 간 대화는 트럼프 정부 시기 긴밀한 미일 관계를 가능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
탄탄한 미일 동맹 기반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에 자율성 확보
일본이 미국에 차지하는 위상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된다. 미국의 협력자로서의 입지를 분명히 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에는 자율적인 움직임을 취할 공간이 존재한다. 지난 10월 일본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과의 회담에서 모테기 도시미쓰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클린 네트워크 참가에 관해 ‘특정 국가를 배제하는 프레임에는 참가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미국의 대중국 포위망인 쿼드(회원국은 미국, 일본, 인도, 호주)에 참가하면서도 쿼드의 성격을 반중으로 규정하는 것에 회의적인 자세를 고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보 부분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책임을 다하는 만큼 중국과의 경제 갈등을 자극할 결정에는 신중하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가지고 친중이라고 평가하는 미국인은 없다. 동일하게 미중 경쟁의 구도 속에 선택을 강요받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중 무역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독자적으로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진행하며 실리를 확보해 왔다. 2018년 5월 리커창 총리의 방일을 계기로 추진 중인 제3국을 대상으로 한 경제협력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리커창 총리 방일 당시 중국과 일본은 ‘제3국에 있어서의 일중 민간 경제협력에 관한 각서’에 서명하였다. 이후 중일 양국은 제3국에서의 민간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위원회의 설치, 민간기업 간 교류를 위한 국제포럼을 아베 총리의 방중 시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실제로 2018년 9월, 베이징에서 ‘중이 민간 비즈니스의 제3국 전개 추진에 관한 위원회’를 개최하였고 같은 해 10월 아베 총리의 방중에 맞추어 ‘제1회 중일 제3국 시장 협력 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미중 경쟁 구도에서 벗어난 중일 경제협력 분야는 독자적인 진행을 계속하고 있다.
‘코리안 핸즈’ 키우는
장기적인 인재 육성 전략 필요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미일 동맹을 보며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을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국 외교는 장기적으로 인재 육성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일본에 호기심을 가진 일본 전문가들의 대부분은 문부성 산하의 ‘국제교류기금’을 비롯해 각종 단체들의 장학금을 지원받아 일본 연구자로 성장하였다. 일본의 다양한 기관들이 제공한 대학, 연구소의 펠로우 프로그램을 통해 잡마켓도 늘 풍부한 편이다. 일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안정적인 진로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한국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국 입장에서 워싱턴에서 발언하는 전문가는 하루아침에 키워지지 않는다. 주요 싱크탱크에 소수의 코리안 체어가 지닌 의미도 중요하지만 북한 문제 이외에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연구자 지원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어야 한다. 정책 공공외교 역시 다변화되어야 한다. 금융, 무역, 디지털 혁신, 의료 보건 등, 한국과의 공동연구를 지원하고 장려하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호감이 다양한 분야의 한국전문가 육성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한국의 외교적 위상도 높아질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코리안 핸즈’가 워싱턴에서 목소리를 내는 날을 진지하게, 과감하게 꿈꿀 때이다.
필자 황세희는 연세대학교를 졸업, 일본 게이오대에서 2012년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일본 정치 전문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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