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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협력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

황세희

2017.03.14

프로젝트: 국내 5대 협력연구기관 공동기획 - 세계 싱크탱크 동향분석
제목: 동북아 정세 변화와 일본사회의 대응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일협력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
저자: 황세희(여시재)
No.2017-09


한일협력의 정체, 이대로 좋은 걸까

나가미네 일본대사가 본국에 송환된 후 한달 이상이 경과하였다. 한국 외교부는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의 이전을 요구하는 공문을 부산시 지방자치단체에 발송하였다. 외교부로서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나름의 제스처를 취한 것이지만 국내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싼 한일간의 대립은 더 이상 양국간의 외교적 사안이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워 졌다. 양국 사회에 있어 한일관계는 외교 사안이라기 보다는 ‘신념’의 문제로 전개되고 있다. 국익보다도 정신적, 윤리적 측면의 승리 혹은 우월감을 고수하는 것이 중시되는 양상으로 변질된 것이다.

박근혜 - 아베 정권 시대에 진입한 이후 한일관계는 좀처럼 회복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양국관계의 현안이었던 위안부 문제 합의와 한일군사정보 보호협정 (GSOMIA)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는 여전히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일 협력이 한반도 주변 정세의 핵심적인 안보자산이라는 인식은 한일양국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근혜 정부의 중국접근 외교를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것으로 인식하고 중국 견제의 시각에서 한국을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과거사 문제의 정치적 부담이 커진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느니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는 논자들도 늘어났다. 과연 한일관계는 이대로 갈등과 불신이 팽배한 상태로 방치해 두어도 좋은 것일까. 다음 세대의 한일관계는 현재의 대립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2017년, 오늘의 일본

한일관계의 다음을 고민하기에 앞서, 우리는 지금의 일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아베노믹스와 도쿄 올림픽 특수를 이용해 장기불황을 탈출하려 애쓰는 일본은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정치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는 경제전략임에 동시에 아베 어젠다라고 불리는 아베 총리와 그 주변 그룹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내정치적 자산이기도 하다. 장기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처럼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면서 그로 인해 획득한 국내정치의 지지를 바탕으로 아베 정부는 미국의 세계전략 속에 수립되었던 패전 후 일본의 근간을 수정하고자 한다. 아베 어젠다로 불리워지는 고노 담화 및 도쿄 재판의 재검증,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나아가 평화헌법의 수정 등을 통해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진 것이 잘못(負けたのが悪い)’이라는, 20세기를 휩쓸었던 제국주의 국가간 경쟁 속에서 일본만이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심리를 근저에 깔고 있다. 잘못한 것은 ‘패전’이었을 뿐, 식민지 지배를 비롯한 서구의 제국주의국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했던 전전의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수정주의자들의 의견이 일본 정치의 중심에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 정치의 우경화는 아베 총리 주변이 독점하다시피 한 국내정치 상황 속에 이를 견제하고 건전한 역사인식을 논의할 공간을 심각히 훼손하였다. 센카쿠제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와 지역경제 리더십을 둘러싼 중국과의 대립과 경쟁은 물론이고 역사 인식을 둘러싼 한국과의 갈등은 아베 정부가 국내 정치를 동원하는 효과적인 자원이 되었다. 이는 1970년대의 후쿠다 독트린 이후 협력적인 아시아 외교를 중시해 온 기존의 일본 외교 담론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동북아 지역의 주요한 협력자로서 한국을 중시하는 담론 및 한일관계 개선을 주장해온 일본내 정책 그룹의 영향력은 더욱 축소되었다.

갈수록 문제 해결이 요원해진 한일관계의 역학

한일양국이 서로 관계개선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 한일관계의 오랜 장애물인 과거사 문제는 더욱 악순환의 구조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위안부 합의 이후 한일양국이 주고 받은 설전은 한일관계를 파탄 나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마지노 선마저 사라진 듯 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국면을 개선하기 위한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반대하는 각국내 여론으로 인해 양국간의 유화적이거나 타협의 제스처를 취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커졌다는 점이다. 결국,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국의 최우선적인 과제가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라고 한다면 이러한 목표를 획득하는 데 있어 가장 부적합한 구도의 게임이 한일양국 사이에 전개되고 있다.

근래의 한일협력이 위안부 합의와 GSOMIA 체결과 같은 성과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압력이 주효하였다. 다만 한국에게 있어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아시아 태평양 전략을 전개하는 일본과 함께 한미일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정치적, 안보적 부담으로 작용한다. 사드 미사일 배치로 인해 중국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비공식적인 경제 압박을 실시하는 사이, 중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한 채 한일관계도 경색된 교착상태(deadlock)에 빠진 것이 오늘의 한국외교이다.

이같은 한국외교의 자충수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간 한일관계는 과거사로 대표되는 정치 이슈의 갈등을 한반도 주변 질서의 안정이라는 안보적 필요성으로 무마해왔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흔히 한일관계는 아무리 나쁘다 해도 어느 수준의 협력은 지속된다는 신뢰 혹은 느슨한 믿음이 존재해 왔다. 그러나 동북아 지역 정세에 대한 양국의 인식은 물론이고 상호에 대한 불신이 기정 사실이 되어버린 현재는 그러한 믿음으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을 노출하고 있다. 이는 정치분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안보 혹은 경제분야의 실무적인 협력은 지속된다는 안일한 믿음이 더는 정치적 갈등을 봉합하지 못할 수준까지 방치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정치 이슈와 안보 이슈의 상쇄작용으로 지속해온 한일관계의 역학을 탈피하여 새로운 협력의 구도를 도출해야 하며, 이러한 새로운 접근을 통해 폐색상태에 빠진 과거사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유도해야 한다.

한일협력 2030: 동북아 질서 구축을 위한 한일협력

이를 위해 필자는 ‘한일협력 2030’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베 다음은 아베’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로 아베를 계승할 일본의 정치 리더십은 척박하며, 아베노믹스 이후의 일본은 사실상 아무런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번 겨울의 정치 변동 속에 한국은 정치 개혁을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거세졌지만 이를 충족시키고 한국사회를 통합해 나갈 정치 리더십을 발견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고령화와 저출산,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산업화 이후 시대의 고민에 빠져있는 양국은 이러한 정치적 빈곤 상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을까. 한일양국은 기존의 국제분업체제 속에서 경쟁과 협력을 지속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2030년, 다음 세대가 짊어지고 나갈 한일관계는 무엇을 지향해 할까.

더욱이 중국이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변모하는 과정 속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다양한 자원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 증가가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 높은 인구밀도와 희소한 자원을 가진 한일양국의 경쟁이 결합할 경우, 동북아에서는 자칫하면 에너지, 식량, 환경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있어 아시아 프리미엄을 촉발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동북아의 잠재적인 갈등요소를 관리하고 장기적인 공동의 성장전략을 수립하여 중국의 도시화, 고도 산업화를 한일양국의 경제 협력과 연계할 때 한중일 간의 경쟁이 상호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삼국간의 경제협력이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상호 교류를 통한 동북아 경제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동북아 협력을 유도해야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동북아 질서 형성이 한일양국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차세대 정치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한일 정치인, 연구자 간의 지적 교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내 정치의 선동수단으로 한일관계를 이용하지 않는 정치 리더십을 배양하여 지속적인 지역내 협력을 심화시킨다면 내셔널리즘에 몰두하여 교착 상태에 빠진 과거사 문제도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을 구축하게 되면 2030년의 한일관계는 갈등과 대립이 당연시 되는 현재와는 다른 차원의 협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사회가 바래왔던 진정한 과거사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세대의 한일협력을 위하여

국교정상화 이후, 한일관계는 과거사를 중심으로 한 갈등을 수면 아래에 둔 채로 협력의 기조를 유지해 왔다. 특히 김대중-오부치 공동성명 이후 실시된 양국간의 전면적인 문화 개방과 인적 교류의 확대는 두 국가간의 사회적 교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한류가 일본사회를 휩쓸고 일본인 관광객이 서울 도심을 활보하던 시기, 일본은 더 이상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될 것만 같았다. 사회 문화 교류가 증폭시켰던 양국간의 친밀감과 우호 관계를 파괴한 것은 양국의 포퓰리즘 정치였다. 환언하자면 현재와 같이 대립과 갈등으로 치닫는 한일관계도 양국정부의 성숙한 대응과 갈등 관리를 통해 시민사회 차원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은 앞으로도 가능하다 할 수 있다. 국민 감정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기보다 중장기적인 국가전략의 관점에서 양국관계를 다룰 정치지도자의 양성과 양국관계를 넘어선 동북아 질서 구축이라는 관점에서의 경제협력이 함께 진행될 때, 진정한 과거사 문제의 해결에 대한 일본정부의 부담도 감소할 것이며 한국사회가 납득가능한 한일합의가 실현될 수 있다. 더는 한일협력이 무의미하다고 보여지는 지금이야말로 한일협력을 끈기있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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