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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적이고 협력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자

전병조 (여시재 특별연구원·전 KB증권 사장)

2020.09.23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적극적 투자 이뤄져야

따로 가는 한국의 혁신역량과 혁신투자 수준

한국의 혁신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블룸버그가 매년 발표하는‘블룸버그 혁신지수’순위에서 한국은 2019년 2위를 차지했다. 2018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유지해오다 7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에 1위 자리를 내준 것이니 사실상 한국의 혁신 역량은 세계 최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다. EU 집행위가 발표하는 혁신지수에서도 한국은 유수한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1위 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European Commission. 2019.9. ‘European Innovation Scoreboard 2019’) 한국의 과학기술(Science & Technology) 클러스터 경쟁력도 높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WIPO)이 조사한 세계 100대 과학기술 클러스터 경쟁력 조사에서 서울과 대전이 모두 30위안에 들었다.[그림 1] 특히 서울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과학기술 선진 도시들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각종 조사에서 보여준 한국의 혁신 역량은 아쉽지만 혁신투자 성적과는 별개로 움직이고 있다. 높은 수준의 혁신 잠재력이 정작 혁신 투자나 모험자본 투자로는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GDP 대비 벤처 투자 비율[그림 2]’을 보면 한국의 모험자본 투자 수준은 해외 다른 나라에 비해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혁신 잠재력을 감안할 때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그림 1] 과학기술 클러스터 순위
(출처: Kyle Bergquist and Carsten Fink. 2020.
The Top 100 Science and Technology Clusters.
World Intellectual Peoperty Organization (WIPO).
중에서 상위 30개 도시 선별, 재작성)
[그림 2] GDP 대비 벤처 투자비율 (출처: Peter Cornelious. 2020. Sources of Funding Innovation and
Entrepreneurship. The Global Innovation Index 2020.)

[그림 2]에서 높은 벤처 투자수준을 보여준 국가들은 스타트업 생태계 경쟁력 순위에서도 모두 최상위권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 3]

[그림 3]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경쟁력 순위 (출처: The Global Startup Ecosystem Report GSER 2020)

한국의 스타트업 투자 상황을 보면,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막상 시험 성적표는 실망스러운 학생을 떠올리게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S&T Cluster 경쟁력 상위) 지원도 충분히 받는데 (높은 R&D 투자) 시험 성적은 그다지 높지 않은 것(상대적으로 낮은 스타트업 투자 수준)이다. 경제규모 세계 10위 수준, 국가브랜드 가치 9위 수준에 비교해 스타트업 투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부진이 시원찮은 성적의 원인

우선 양을 보자. 스타트업 투자 규모의 총량을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우리 정부는 2017년 이후 공적 재원을 대폭 확대해 벤처투자 활성화를 도모해 오고 있다. 특히 2019년 벤처투자액의 증가폭은 인상적인 수준이다.[그림 4]

올해도 정부는 모태펀드 9,000억 원을 기반으로 총 1조 9,0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출자 재원의 절반 이상인 5,200억 원은 창업 초기에 투입하고, 나머지 3,800억 원은 후속 투자 촉진을 위한 도약 단계에 투입하기로 했다.(중소벤처기업부 보도자료. 2020.1.29.)

[그림 4] 2018년-2019년 월별 스타트업 투자유치 금액
(출처: 플래텀. 로켓펀치. 2020.03.
‘2019 국내 스타트업 투자동향 보고서’)
[그림 5] 2018년-2019년 업력별 스타트업 투자유치 금액
(출처: 플래텀. 로켓펀치. 2020.03.
‘2019 국내 스타트업 투자동향 보고서’)

문제는 질적 측면이다. 재원 배분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뤄지는가의 문제인데, 늘어난 재원이 실제 필요한 곳에 투자되느냐 여부에 따라 스타트업 생태계의 경쟁력이 결정된다. 한국의 경우 벤처 투자액이 단기간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됐듯이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그림 5]

한국보다 상위권에 포진한 유럽 국가들을 보면 스타트업의 생애주기에 걸쳐 고르게 투자가 이루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인상적이다. 이들 국가에서 선순환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상위권 국가들이 제도적으로 우리와 대비를 이루며 경쟁력 있는 생태계를 구성하는 비결을 선별해 보았다.

<경쟁력의 비결 1>
초기 스타트업 활성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공공부문

스타트업 생태계 상위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공공부문이 적극적인 시장 조성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시장이 외면하기 쉬운 초기 스타트업 투자 활성화를 위하여 공공부문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스타트업 투자를 위한 전문투자기관을 설립하고, 공공금융기관이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자금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사례들이 있다. [표 1]

영국은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Silicon Valley Bank, SVB)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스타트업 전문은행 그룹인 ‘British Business Bank’(BBB)를 2012년 설립했다. BBB는 금융자금, 재정자금 등 재원을 세계적 경쟁력을 보유한 영국의 투자은행 산업과 연계, 파트너십을 통해 스타트업 지원의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BBB는 재정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간접적으로 나누어 주는 기능적 역할에만 머물지 않는다. 산하 투자회사를 통해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투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프랑스는 아예 종합적인 투자은행인 ‘프랑스 공공투자은행’(BPI France)을 2012년 말 창설했다. BPI는 프랑스 중소기업 지원 기관(Oséo), 기업 지원을 위한 예금공탁금고(CDC Entrepries), 프랑스국부펀드(FSI) 등 기존의 3개 기관을 통합해 설립했다. BPI는 프랑스 혁신투자를 활성화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대표적인 액셀러레이터, 인큐베이터를 파리 시정부와 공동으로 설립하거나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BPI는 한국으로 치면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의 3개 기관을 합친 것과 유사한 업무 영역을 갖고 있다. 한국의 공공 금융기관들이 주된 기능 외에 부가된 ‘분절된’(fragmented) 업무를 십시일반 식으로 수행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표 1] 유럽 주요국 공공부문의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노력 (출처: KOTRA. 2018. ‘유럽스타트업 생태계 현황과 협력방안’에서 재편집)

독일의 공적 개발투자은행 KfW도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KfW는 한국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을 합친 것과 유사하다.) 초기 스타트업들에게 창업 자금을 ‘대출’해 준다는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아이디어 단계에 머물고 있는 초기 스타트업에게 ‘대출’해 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스타트업 육성에 대한 독일 정부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과감한 초기 자금 운용은 네덜란드에서도 드러난다. 네덜란드 ‘스타트업 초기 자금조달제도(VFF)’ 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기 위한 예비 창업자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경쟁력의 비결 2>
해외 창업자와 인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방적 제도

스타트업 생태계 상위 유럽 국가들은 개방적인 스타트업 육성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즉, 해외 스타트업 창업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특별한 창업비자 제도와 외국인 창업지원제도를 운영하고 있다.[표 2]

[표 2] 영국과 프랑스의 창업비자제도 (출처: KOTRA. 2018. ‘유럽스타트업 생태계 현황과 협력방안’에서 재편집)

개방적인 스타트업 지원 제도는 우수하고 혁신적인 해외 사업가와 두뇌를 자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로 유치하여 전체 생태계 활성화는 물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다.[그림 6] 기술 전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속지주의(屬地主義) 스타트업 생태계 육성 전략은 눈여겨볼 만하다. 자국에 없는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들여오면 스타트업 생태계의 깊이와 폭을 확장할 수 있다. 기술보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시장 친화적이고 합법적인 기술경쟁력 확보 전략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럽 선진국들의 모습은 우리와 매우 대비된다. 한국도 유사한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며 최근 제도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으나[표 3],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진 해외 스타트업의 창업은 단 한 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국내도 잘 안되는데 하물며 해외 창업자까지 지원한다’ 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면, 유럽과 우리의 차이를 메우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그림 6] 유럽 주요국 스타트업 해외인력 유입 비율
(출처: KOTRA. 2018. ‘유럽스타트업 생태계 현황과 협력방안’에서 재인용)
[표 3] 한국의 해외 창업 비자제도 개선

<경쟁력의 비결 3>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적극 참여하는 대기업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스타트업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국내외 대기업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표 4]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유럽 선진국에서는 자국 또는 글로벌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또는 인큐베이터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스타트업과 대기업이 ‘불가근(不可近)의 관계’에 놓여 있는 한국의 상황과 매우 대조적이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 CVC)이 미국이나 유럽 각국에서 폭발적으로 스타트업을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는 시기에도 한국에서는 여러 해 논의만 하다가 시간만 허비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상생․협력적 생태계가 기능하지 못하면 경제 전체 혁신 생태계가 ‘파편화’되어, 모두가 敗者(loser)가 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이 연출된다. 전체 벤처 투자수준이 낮아지고,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가 적어지는 시장실패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이디어만 가지고 창업한다는 이야기는 ‘태평양 건너의 일’ 일 뿐이다. 창업을 시도하려는 스타트업이 줄게 되고,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은 그저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시장 자생적인 모험투자가 줄어들게 되어 결국에는 공적 재원을 필요 이상으로 투입해야 하는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표 4]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대기업의 역할 (출처: KOTRA. 2018. ‘유럽스타트업 생태계 현황과 협력방안’에서 재편집)

유럽의 스타트업 생태계 우수 국가들의 사례들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이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책제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제안>

1. 벤처 전문 투자은행을 설립하자

첫째,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원활한 투자를 위해서는 공공금융기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와 대출을 시장 기능에만 맡겨두지 않고 공적 금융기관이 직접 실행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은 적극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간접지원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즉 공공재원을 직접 투자하거나 빌려주기보다는 민간의 자산운용사에 재원을 나누어 주거나 신용보강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초기 스타트업보다는 이미 ‘성숙한 스타트업’에게 자금이 집중되는 현상이 반복된다.[그림 5]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에서는 모두 공공투자금융기관이 초기 스타트업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도 가능한 한 공공기관이 직접 투자하거나 대출을 해주고 있다. 한국도 벤처전문 투자은행의 설립을 적극 검토하고 그 주된 역할을 초기 스타트업 지원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2. 해외 인재의 창업을 적극 유인하자

둘째, 해외 창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할 수 있도록 유럽식 창업 비자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해외 인재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하면 그만큼 경제성장에 도움 되고 일자리도 늘어나게 된다. 첨단기술 산업의 세계 공장이라는 지위는 국내외 대기업이 한국에 많이 유치될 때 실현 가능하다. 그러한 대기업들은 또한 유능한 협력업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산업 생태계가 있을 때 유치 가능하다. 그 기반을 한국의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들만으로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해외의 기술 두뇌와 창업가들이 한국도 몰려들 때 가능하다고 본다.

3. 대기업이 스타트업 육성에 나설 유인을 강화하자

셋째,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스타트업 생태계 육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고 유인을 강화해야 한다. 우선 CVC가 온전한 형태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개방형 혁신에 관심 있는 많은 대기업들이 액셀러레이터와 인큐베이터를 설립하거나 파트너십을 구성해 초기 스타트업 육성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유인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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